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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 Jul 24. 2020

런린이의 마라톤 도전과 실패

2020년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살이 많이 (엄청) 많이 쪘고,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심장이 힘차게 두근거릴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목표가 있으면 좋으니 짧은 거리라도 대회에 나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 3월 22일에 열리는 서울국제마라톤을 무작정 신청했다. 10k, 참가비는 오만 원. 완주 제한 시간은 1시간 30분.

1월 5일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애플 워치 차고 패딩 걸치고 대충 스트레칭 비슷한 것을 하고 나이키 런 클럽 앱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새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미아동에는 달리는 사람이 별로 없고 달릴만한 곳도 별로 없다. 그냥 발길이 닫는 대로 평탄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최대한 탐색해볼 요량이었다. 1k를 다 뛰고 나니 7분 20초가 나왔다. 너무 느려서 깜짝 놀랐다. 땀이 줄줄 나는데 패딩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기침이 엄청 나오고 내가 과연 이 상태로 10k를 뛸 수 있을지 의심되고 이렇게 무작정 뛰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것은 기분이 상쾌하다는 것! 그리고 조깅화가 필요하다는 것(운동은 장비 빨).



1월 9일 목요일 아침, 인터벌 트레이닝을 처음으로 해봤다. 7분 워밍업, 3분 벤치마크, 5분 쿨다운. 7분 동안 약 900미터를 뛸 수 있었는데, 이미 이때쯤에 심박수가 150을 넘어섰다. 인터벌 트레이닝이라 함은 강한 운동과 휴식을 반복하는 중장거리 연습인데, 보통 1분당 심박수가 130~150 정도가 되도록 운동하고, 휴식기에는 110~120 정도로 유지한다. 그래도 한번 뛰어보자는 마음으로 추가로 약 500미터를 최대한 달려 봤는데, 페이스는 킬로당 6분 13초 정도였고, 심박수는 180을 찍었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달린다는 게 강도 조절이 가능한 건가? 근 10년간 이렇게까지 심박수를 올려 본 것은 수영 몇 번 정도, 요가 한 두 번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왜 달리기를 시작한 것일까?

1월 11일 토요일 저녁에는 분당에서 탄천을 달렸다. 공기가 차고 맑아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6.8킬로를 뛰었는데, 달리기 좋은 환경이어서 그런지 2k 정도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이후로는 너무 힘들면 걸으면서 호흡을 골랐다. 7k도 안 뛰었는데 57분이 걸렸다. 10k를 1시간 30분 안에 완주하는 것이 목표인데 속도는 여전히 너무나도 부끄러운 수준이고 달리기에 관한 지식도 없었고... 다만 두 팔과 다리가 제대로 달려 있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내가 지금 존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물 받았다. 하루키는 책을 쓴 시점으로부터 23년 전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꾸준히 겨울에는 마라톤 풀코스 대회에 참가하고 여름에는 트라이애슬론도 하면서 거의 매일 뛰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달리기가 삶의 일부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별 일 없는 하루를 보냈을 때, 그래도 오늘은 달린 거니까.



겨울에는 달리면 몸이 많이 뜨거워져서 도로 사정만 괜찮다면 달리기 아주 좋은 계절인 것 같다. 한 달 정도 달려보니 기록이 많이 좋아지진 않았지만 나름 여유로워졌다. 달릴 땐 하늘을 많이 보는 것 같다. 계절에 맞추어 달라지는 나무나 풀도. 겨울이 끝나가는 느낌.


열심히 그리면서 공부(뿌듯하다)


잘 달리는 방법을 정리하고 싶어서 그림도 그려봤다. 체중 때문에 무릎이 안 좋아져서 침도 몇 번 맞긴 했는데(한의사의 잔소리...), 그림을 그리던 2월 중순 즈음에 코로나 19 때문에 대회에서 환불 신청을 받기 시작하더니, 3월 2일에는 공식적으로 취소했다. 그래서 런린이의 마라톤 도전은 실패. 그림은 천천히 완성했다. 쓸모 없어지지 않도록 내년에는 마라톤 대회가 무사히 개최되었으면 좋겠다. 하루키는 달리기에 관하여 쓴 자신의 책을 이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이제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스쳐 지나며 레이스 중에 추월하거나 추월당해 왔던 모든 마라톤 주자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달리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도 누군가와 함께 달리고 싶다. 가을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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