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일기 02
25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버카스텔은 세계에서 손에 꼽히도록 크고 오래된 필기구 회사다. 1761년 독일 슈타인의 무역업자를 위해 가구를 제조하던 카스파르 파버가 남는 시간에 연필을 생산하여 성공하게 된 것이 파버카스텔의 시작이다. 1839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22세에 경영을 이끈 카스파르 파버의 증손자 로타르 폰 파버는 최초의 육각형 연필을 고안하였고 연필에 경도의 개념을 적용했다. 또한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흑연심을 위하여 시베리아에 흑연 광산에서 원자재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재료로 1905년 탄생한 카스텔9000은 특허로 보호되고 있는 흑연과 점토의 배합 비율로 제작된 연필심과 친환경 수성 녹색 페인트로 도장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빈센트 반 고흐, 귄터 그라스 등이 애용하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고흐는 이 연필에 대하여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 단단하면서도 매우 부드럽고 목공용 연필보다 색감도 훨씬 좋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08년, 파버카스텔은 표준 수채색상에 맞춰 60색으로 구성된 폴리크로모스 전문가용 색연필을 시장에 선보였다.
현재 폴리크로모스 전문가용 색연필은 최대 120가지의 컬러로 구성되어 있고, 부러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연필심에 코팅이 되어 있으며, 기름을 원료로 하여 물에 번지지 않는 유성 색연필로 생산된다. 낱개 가격 $2.85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무 케이스에 든 120색 $638.50까지 구성은 다양한데, 12색, 24색, 36색, 60색이 각각 틴 케이스에 포장되어 판매되고 있다. 다양한 브랜드의 색연필 중에서도 심의 강도가 높은 편이어서 쉽게 닳지 않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평가받는 색연필이다.
이 폴리크로모스 전문가용 색연필은 그림 그리는 이슨생이 선택한 색연필이기도 하다. 처음 이슨생이 쓰던 색연필은 마트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문화사 36색 색연필이었는데, 지금은 폴리크로모스 전문가용 색연필 60색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핫트랙스에서 10퍼센트 저렴한 가격인 123,300원에 판매중이다. 이슨생은 이 색연필을 사기 위해 마음을 다졌을 터이다. 그가 무직인지도 2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 영문학을 전공했던 이슨생은 어느 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하던 일을 접고 색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지금은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처음 이슨생은 얇은 종이에 아주 작은 컵케익이나 새 같은 것을 그렸다. 손톱만한 그림을 오려 갖고 놀면서 사진도 찍고, 가끔은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놀이는 지금 판이 커져서,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그림으로 가득하고, 그라폴리오, 브런치 등에 꾸준히 그림이 올라오고 있다. 이후로는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그리거나, 가고 싶었던 외국 여행지를 그리거나, 잠옷을 입고 소파에 누워있는 푸들 혹은 작은 베레모를 쓰고 그림 그리는 고양이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최근에는 조카와 그림을 그리며 어린이 미술에 관심이 생겨 그림 가르쳐주는 유투브 채널 ‘이모네 아틀리에’를 구상 중에 있다.
이슨생과 수다를 떨다 그의 손을 보면 색연필을 너무 많이 쥐어서 뒤틀어져버린 손가락이 꽤나 진지해 보여 나도 모르게 혼자 숙연해지고는 하는데, 가끔 그가 카페에 색연필을 챙겨와 그림을 그릴 때면 손때 묻은 색연필 자루 깊숙이 숨겨진 몽당 색연필에 호기심을 갖고는 한다. 너무 짧아져버린 색연필을 애써 쥐면서 연필깍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슨생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에게 비춰진 세계를 표현하고 자신만의 것을 더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얻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세계에 대한 표현 수단으로서 색연필은 가장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색연필은 색조의 구분이 명확히 되어 있어 이를 표현하는 데에 좋은 재료이다. 색연필은 쥔 손의 압력 또는 각도를 미묘하게 조절하면서 색의 명암이나 강약 등의 표현을 섬세하게 달리할 수 있다. 따라서 색연필이 종이 위에 지나간 자리의 질감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림이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가장 쉽게 접하는 그림 재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친근한 느낌 또한 준다. 이슨생이 주로 색연필을 사용하여 본인의 그림을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정서 전달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슨생의 그림은 감수성에 대한 표현에 중점을 두었을 지언즉 기교면에서 완벽해지려는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색연필이라는 재료의 한계 안에서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형태, 그 형태가 갖는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는 시도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주로 어떤 것을 그리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주로 평범한 것들을 그린다고 대답했다. 언젠가는 유리나 플라스틱, 점토나 나무, 유화나 수채화를 사용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지금은 색연필을 다루는 데 가장 숙달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대답에 매우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질문하자 이슨생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던 나를 끄집어내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슨생이 이미 스스로의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이 세련되지 않아도, 그가 쥔 몽당 색연필이 그어진 거리만큼, 그리고 앞으로 그어질 거리만큼,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고, 꼭 지금처럼만 그려나갔으면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이슨생의 그림을 보았으면 한다. 이슨생이 스스로 그리고 싶은 만큼 많은 그림을 그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