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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Dec 23. 2019

오랜만에, 연필

손으로, 연필로 글을 쓴다는 것은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꺼내놓는 일.

‘또박또박’ : 꼼꼼하고 자상하게.


내일은 연필깎이를 사러 가야지. 

서툴게 깎인 연필은 왠지 마음마저 무디게 만드는 것만 같다.     


눈이 내렸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던 첫눈과는 달리 생각보다 굵은 눈이 왔다.

싱겁게 흩날리다가 비가 되고, 땅을 적시고, 그치고 말았다.

예전만큼 눈을 기다리진 않지만 스치듯 사라지는 건 아쉽고 속상하다.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지나온 세월이 많아서 

내 곁에 더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이 어색하게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더 오래 남아주기를 바라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런 마음을 잘 간직하고 이어나가기만 하면 좋을 것 같다. 잃지 않기를 바라본다.          


- 2019.12.21.



집 밖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싶었지만, 연필깎이를 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잘 깎인 날카로운 연필심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집을 나섰다. 미세먼지가 자욱해 골목길 가로등 밑이 뿌옇게 보였다. 

칼칼한 공기를 마시며 다이소에 갔다. 한 번에 못 찾고 헤매다 작고 귀여운 노란 연필깎이를 찾아냈다. 

여기저기 서성이며 연필꽂이와 지우개가 달린 주황색 줄무늬의 연필 여덟 자루, 

사무용 지우개까지 챙겼다. 다 모아서 손에 들고 있자니 배가 다 부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육체의 배는 고팠기 때문에 집에 가는 길에 분식점에 들러 매운 제육 김밥을 포장했다. 

편의점에서 커피와 마카롱도 골라왔다.      


맵고, 쓰고, 달콤한 것들을 잔뜩 먹고

잘 깎인 연필로 글을 쓰고 있으니 미세먼지를 뚫고 나갔다 온 것이 아주 뿌듯했다.

오늘의 목표는 다 이룬 셈이다.


* 연필의 단점

: 너무 잘 번진다. 한 페이지에 채워 넣은 글자들이 맞닿는 옆 페이지에 자국을 남긴다. 

   글자들이 희미해지면서 자꾸 번지고 만다. 


* 연필의 장점

: 생각도 잘 번진다. 한 페이지를 채우고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또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난다. 

   금세 다음 페이지로 생각이 번지고 채워진다.     


* 걱정되는 점

: 연필을 밖에서도 쓰려면 연필깎이를 들고 다녀야 하는 걸까. 은근히 번거로운 일이다. 

   아주 작은 사이즈의 연필깎이를 구해봐야겠다.     


- 20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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