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글은 낙서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땐 금수저니 은수저니 다 필요 없이 부러움을 사는 유형의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인 슈퍼 집 딸이었다(문방구 집 자녀도 잘나갔다). 군것질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나는 애초에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어린이였고, 더운 여름에도 하루에 한 개의 아이스크림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슈퍼 집 딸 타이틀을 맘껏 누렸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슈퍼는 슈퍼인데 동네 초입에 있는 아주 작은 구멍가게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리 집이 가게를 하는 게 싫었다. 한창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데 엄마가 집안일을 할 땐 내가 가게를 대신 봐야 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놀다가도 엄마가 멀리서 이름을 부르면 가게로 뛰어가야 했다. 심지어 동네 친구들을 시켜서 동네 구석 어디든 날 찾아내기도 했다. 구멍가게도, 엄마도 원망스러웠지만 나는 단 한 번의 반항 없이 가게로 향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가게는 집과 나무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기보다는 거기서 컸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나는 가게를 보는 동안 멍을 때리거나 책을 읽거나 망상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뭔가를 적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딱히 할 게 없었던 게 큰 이유였을까.
정확히 내가 언제부터 무언가를 끼적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분명하진 않다. 일곱 살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인 것 같은데. 글을 쓰던 배경은 항상 그 작은 구멍가게였다. 자기 손바닥보다 살짝 큰 분홍색 수첩 낱장에 무지개, 장미, 바람과도 같은 모호한 주제로 글을 썼다. 사랑이니 행복이니 여러 감정에 대해서도 적어댔다. 그 종이들이 꽤 모이면 엄마가 스테이플러로 찍어주곤 했는데 그게 뭐라고 두툼하면 뿌듯했다. 퇴근한 아빠에게 그걸 보여주며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글을 쓸 땐 간혹 얼마 높지도 않은 옥상에 올라가기도 했다. 구멍가게 크기만큼 작은 옥상이었고 땡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곳이었는데 나는 그곳에 종종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가게는 네 갈래 길 중앙에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동네의 중심. 그땐 그 동네가 왜 그리 넓어 보였는지. 그 중심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생각보다 내가 사는 곳은 조용하고 휑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구경하다가 다시 계단에 걸터앉아 또 무언가를 적었다. 그렇게 밖에 오래 있다가 집에 들어올 때면 내 몸에는 볕과 바람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때는 나름 진지하게 무언가를 끄적였겠지만, 나이를 먹고 생각해 보니 낙서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 적어도 상관없는, 어렵지 않게 충동적으로 적어 내려가던, 한두 장쯤 사라져도 기억 못 할 낙서. 안타깝게도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를, 그 동네 어딘가에 나뒹굴 것만 같은 종이 쪼가리들.
어쩌면 글은 낙서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필을 쥐고 그 주먹 크기만큼의 힘으로 꾹꾹 눌러쓰는 글자들. 작은 가슴에 다 품을 수 없어서 쏟아내던 마음들. 커다란 글씨로 단어마다 두세 줄로 축약해 나만의 사전을 만들던 나날들.
그 시절을 회상하면 강원도에서 연고도 없는 수도권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은 젊은 부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나를 가지면서 결혼을 했다. 연탄을 때는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해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열고, 여전히 그 동네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조금씩 집을 넓혀가던 부모의 삶이 그 동네에 다 축약돼 있다.
작은 구멍가게 집은 장마철엔 비가 새서 세숫대야를 이곳저곳 받쳐놔야 했고 벽에는 곰팡이가 슬었다. 철모르는 아빠는 자주 밥상을 엎고 집안을 어지럽혔다. 어린 마음에 자주 비가 내렸고, 자주 엉망이 됐지만 나는 참을성 있는 아이로 자랐다. 낙하하는 마음을 곧잘 낙서로, 글로 표현했다. 비록 솔직한 글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다운 글로 표현하는 게 좋았던 것 같다. 나한테 스스로 거는 주문처럼.
나이를 먹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괜찮아졌다. 오히려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그때의 주문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거라고 믿고 싶다. 낱장에 써 내려가던 낙서와도 같던 글들이 그때의 나를 지켜준 거라고.
가끔은 분홍색 수첩 낱장에 적힌 글자들이 눈에 선하다. 여전히 그 동네 어딘가에, 그 구멍가게 안에, 가게와 연결된 나무문을 열면 나오는 나의 작은 방에. 서랍 안쪽을 더듬으면 두툼한 종이 뭉치가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아마 영원히 그곳에 보관돼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