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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Aug 19. 2021

사랑스러운 로컬 인생

무엇을 선택해도 적당히 괜찮은 삶



로컬 인생이라는 멋진 말은 언젠가 난다 작가의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처음 보았다. 아마도 웹툰 속에서는 '로컬 라이프'라는 단어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웹툰 속의 난다 작가는 집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동네 안을 돌며 살아간다. 아무런 불만도 없이. 그 모습이 꼭 나 같아서 한참 그림을 들여다본 기억이 난다. 적은 움직임들만으로 많은 것이 충족되는 세계가 사랑스러웠다.


나는 거리를 미터(m)나 킬로미터(km)와 같은 단위로 재는 걸 꽤나 헷갈려하는 편이다. 그래서 '시간'을 단위로 거리를 설명해보자면, 30분 이상의 거리는 내게 다소 먼 거리로 분류된다. 걸어서 가든 탈것을 이용하든 내가 있는 곳에서 목적지까지 30분 이상이라고 하면 '음...' 하고 방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거의 없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동네를 걸어서 한 바퀴 돌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빌딩이나 사람이 와글와글한 대형 쇼핑몰 같은 것은 내가 사는 이 도시에 없다. 그래도 필요한 것은 근방에 다 있으니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이 생산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되는 시대에, 소도시의 삶은 축소의 미학을 선물한다. 나의 하루치 필수재는 커피 한두 잔, 책 몇 권 정도. 여러 번 실험해 봤지만 정말 그 정도면 충분하다. 조금 더 추가하면? 가끔 작은 가게에서 오늘 새벽 근처 밭에서 수확된 로컬 채소와 과일을 사 온다. 가을에는 집 근처의 호수 공원을 난다 작가처럼 빙글빙글 걷는다. 아주 단순한 하루가 주는 기쁨을 느끼면서.


선택지는 적지만 무엇을 선택해도 적당히 괜찮은 것들로 이루어진 . 나는 로컬 인생에서 그런 삶을 꾸리기를 원한다. 선택에 드는 에너지를 줄이면 나의 한쪽 다른 편에는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에너지가 쌓인다.


남편 역시 나처럼 로컬 인생을 추구한다. 둘이 동네를 산책하다 새로운 빵 가게를 발견하면 '오오...!' 하며 기뻐한다. 우리는 빵을 좋아하지만 동네를 벗어나면서까지 맛있는 빵 가게를 찾아다니지는 못한다. 로컬 인생의 바운더리 안의 것들만 누린다. 그래서 그 안으로 새로운 것이 추가되면 일단 행복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사할 때 그 동네의 튀김, 김밥, 짜장면 가게들과 마음 깊이 작별한다. 근처로 이사했기 때문에 '가면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진정한 로컬 인생은 뭔가를 먹으러 다른 동네로 좀처럼 가지 않는 법이다.


새로 생긴 빵집에 로컬러들은 감탄해버렸다



다만 우리 부부가 로컬 인생을 지향한다고 해서 아이의 동의까지 구한 것은 아니다. 그 지점에서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야 로컬 인생을 선택하고 그로 인해 충만한 삶을 사는 법을 이미 터득했지만 아이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거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다른 비교군을 경험하고 선명한 확신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는 '-로컬 인생' 겪어볼 권리가 있다. 사실 어디론가 떠나 경험하게 되는 새로움과 낯섦, 눈부신 찰나들에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 살아가며 영원히 기억되기도 하는 생동의 순간들은 역시 비-로컬 라이프에서 주로 얻게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주말이 되면 종종 스스로와 싸우고 있다.


동네 카페에서 책 들고 차 한잔 하면 좋을 것 같아
vs.
멀리 어디론가로 차를 몰고 나가자



완전히 반대인 두 마음이 한 사람에게서 솟아오르다니. 결국 이틀 중 하루 정도는 비-로컬러가 되는 것으로 타협 지점을 찾는다. 30분이 다 뭔가. 1시간이 넘는 거리로 갈 때도 있다! 그렇게 낯선 경험들을 온몸으로 겪다 돌아오면 마음이 조금 너덜 해져 있다. 얼른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것이 간절해진다. 내가 잘 아는 익숙한 곳과 익숙한 맛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그래도, 돌아오는 차에서, 본다. 아이의 얼굴이 낯섦들에서  흥분으로 얼마나 빨갛게 물들어 있는지. 역시 당분간은 로컬과 비-로컬 인생의 경계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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