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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Feb 23. 2021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개뿔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서 - #5

아빠는 남자아이를 중요시하는 가족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둘째 아들이란 이유로 그리 큰 사랑과 믿음과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사는 것이다"라는 말로 모든 영광과 명예는 형님인 큰아빠께 넘겼고, 작은아빠께서 막내아들로서의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셨다.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고모들께선 가만히 소외될 정도로 만만한 성격들은 아니셨기에 독한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찾아 나서며 각자도생 하셨다.


아빠는 그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만만한 듯 소홀한 듯, 동생들에게 존경받거나 형님에게 존중받는 호사를 누리진 못한 애매한 둘째 아들이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잘 못하고, 내 껀 내 꺼라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소심이, 얼굴 붉히는 일은 외면하고 말아버리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런 가족 내 아빠의 소극적인 위치를 알음알음 알았던 나였기에, 내게 친가 친척들은 그리 달갑고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고, 그래서 할머니가 땅을 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땅이라면 다 좋은 것일 텐데 그 좋은 땅을 다른 친척들이 쉽게 아빠에게 내어주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만 그 땅이 아직 도로와 이어지지 않은 맹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쓸 만한 땅이었으면 상속문제로 인한 그 흔한 개싸움 하나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런고로 아빠와 엄마는 시댁으로부터 땅(꽤나 쓸모를 찾을 수 없는 땅)을 약 500평 정도 받으셨다. 이왕 넘겨받은 땅이었다. 어차피 아빠의 빚은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할뿐더러, 네 가족이 떨어져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맹지를 쓸 만한 땅으로 만들기 위한 도로를 내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부모님께선 즉시 도로를 내기 위해 또 돈을 버셨다. 다행히 오빠는 군대에, 나는 대학생이 되어 더는 부모님께 이렇다 할 지원을 받지 않게 되니 육아에 드는 돈을 아낄 수 있지 않으셨을까. 엄마는 직장에 식당을 나가고 지인들의 소개를 받아 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도 감행하셨다. 매일 새벽에 출근하시고, 매일매일 하루 1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셨다. 무릎이 닳고 허리가 쑤시고 손목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셨다. 평생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아빠도 그런 비극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고물상과 공사장을 돌아다니셨다.


도로를 낼 때 웬 사기꾼 아저씨가 나타나 분명 국가 명의로 도로가 내어질 거라는 말에 우리 땅 200평과 이웃의 땅을 맞바꿨더니 우리가 쓰려고 낸 땅이 엄한 집 명의로 넘어가서 명의 이전을 해야 되네 어쩌네... 하는 사연만 빼면 결론적으로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제 집을 지을 차례였다.


이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계셨다. 북적북적하고 모든 서비스와 시스템이 갖춰진 도시를 좋아하시는 엄마는 원래 살던 아파트에서, 조용하기도 하고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고향의 공기와 사람 냄새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시골 땅에 집이 지어지면 시골에서 사시기로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다. 그래선지 아빠는 집이 지어지는 현장에 들어가 직접 바닥부터 기둥, 천장까지 손을 대셨다. 그 당시에 엄마와 아빠는 많이 들뜨셨다. 엄마에겐 쉬고 싶을 때마다 여행 올 수 있는 별장이 생긴 것이고, 아빠에겐 그토록 바랐던 전원생활의 실천장이 생긴 것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집에 들뜬 사람이 엄마와 아빠뿐만이 아니라 집을 짓는 과정을 총괄하시던 사장님께서도 꽤나 애정을 가진 모양이셨다. 엄마와 아빠의 예산은 3천만 원이었다. 평소엔 아빠 혼자 살 집이기 때문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립식 주택을 짓길 원하셨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서로 소통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찌어찌 짓다 보니 2층이 생겨버렸고, 예쁜 계단이 생겼고, 커다란 거실을 화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집이 지어졌다. 당연히 예산은 한참을 초과하여 거의 1억에 가까워졌다고 했다.


또또 빚이 생겼다. 엄마는 애초에 사장님과 얘기할 때부터 쓰셨던 메모를 한참을 들여다보시면서 한숨을 푹푹 쉬셨다. 가지고 있는 3천만 원에 아파트 융자를 껴서 겨우 마련한 돈이 5천5백만 원이었기에 집은 지어지다 말았다. 땅이 집집마다 층층이 나뉘어 있어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필수인 담도 쌓지 못했고, 정화조 공사를 하지 못해 한동안 화장실과 부엌을 쓰지 못하는가 하면, 목재로 꾸며진 집안 내부에 바니쉬를 칠하는 일마저도 가족들 손으로 끝내야 했다. 게다가 집을 짓기 전부터 해야 할 대지 측량이며 세금 신고 등을 집을 다 짓고 나서야 하게 되니 꽤 많은 금액이 부과되었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데, 우리의 하늘은 얼마나 넓길래 한 번 무너지는 걸론 어림도 없나 보다. 1년 여 만에 집이 다 지어지고서도 허우대만 멀쩡한 빈 집을 바라봤다. 엄마는 지금 있는 아파트만으로도 벅찼는지 이제 막 지은 시골집과 지금의 아파트를 팔고 옆 동네 조금 더 싼 빌라로 이사를 갈까 어쩔까 고민하셨다.


그 무렵, 그러니까 2017년에 나는 1년 간의 자취를 결정하고 집을 나왔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4학년이 되기 전에 휴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년의 자취가 끝나면 나는 어느 집으로 가게 될까 궁금했다. 자취를 하는 동안 부모님께선 내게 집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셨고 나 또한 내 살 길이 급급해 집안 사정을 돌아보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확신했던 건 '그래도 시골집으로는 가지 못하겠구나'였다. 그리고 1년 뒤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집들'로 돌아갔다. 엄마와 아빠는 어느 집도 놓치지 않고 단단하게 붙들고 계셨다. 2018년에 돌아간 시골집은 어느새 아빠의 삶터가 되어 있었다. 아빠는 그 무렵부터 시골집 주변의 산을 돌아다니시며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셨다. 한 달에 적게는 3일 쉬는 게 전부일 정도로 고된 일이었지만, 아무나 나서지 못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기에 일당이 높았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일 자체를 할 수 없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일을 하셨다. 고물상에서보다 두 배 가까이 돈을 벌게 되자 아빠의 어깨가 단단해지는 것을 보았다. 약 20년 만에 자랑스러운 월급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매년 천만 원 정도의 돈을 집에 쏟으셨다. 부족한 돈은 직장 생활을 하는 오빠에게서 빌렸고, 그 빌린 돈도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꼬박꼬박 갚으셨다. 그리고 2021년, 웬만큼 들어갈 돈은 다 들어간 상태로 이제는 차근차근 집에 들이는 돈을 줄일 때라고 부모님은 말하셨다. 처음으로 안정기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여전히 아빠는 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이시고, 아직도 엄마는 아파트 대출 이자를 갚느라고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시며, 아직 자식들 모두 분가하지 않은 캥거루들(하지만 절대 부모님께 만 원이라도 손을 벌리진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지)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빚만 갚아야 할지도 모르고, 그 때문이라도 우리 가족은 평생 가난할 것이다.


다만 부모님의 사명감을 이해할 수 있다. 엄마와 아빠의 빚과 가난의 영향이 자식들에게까지 끼치지 않길 바라고 계신다. 영향을 끼칠지언정 그것이 자식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많은 돈과 시간과 영혼을 들여가며 집을 지키고 계신다. 결국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저녁밥을 먹을 집을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불행한 삶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갈라서지 않는 것 또한 혼자 힘으로는 이 가난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그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뼈 저리게 느끼셨을 것이다.


혼자서는 가난에서 행복할 수 없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누군가의 실수로 온 가족의 하늘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결혼'이라면, 역경 속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안녕과 행복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존재가 '반려자'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 가족은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을 찾지 않았다. 무너진 하늘을 다시 올려 보낼 수도, 무너진 하늘을 뚫고 우리가 하늘 위로 올라갈 수도 없다. 우리는 땅을 떠날 수 없다. 가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이 무너졌을 때, 또 한 겹의 땅이 생겼을 뿐이니 그 위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발 밑에 쌓인 가난의 터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위에서라도 살아야 한다.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린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글을 쓰는 시간도 나에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주변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어서 직장을 구해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 일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님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나와 오빠의 삶에 간섭하신 적이 없으셨다. 성적표를 흔들면서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러니?"라며 화를 내신 적도 없으시고, 오빠가 여러 해 입시 준비를 할 때도, 내가 2년 동안 휴학을 하겠다고 우겼을 때도, 대학을 졸업한 내가 취직 생각이 없다고 말할 때도 부모님은 못 미덥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으셨다.


언젠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 곧 대학 졸업하면 엄마한테 효도하면서 살게."


그러자 엄마는 말씀하셨다. "니 앞가림이나 잘해."


문장으로 써 보니 상당히 정나미 없이 쓰였으나 사실은 짓궂은 장난처럼 웃으며 건넨 진심이었다. 엄마는 많은 걸 내게 바라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마음껏 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셨다. 그 누구의 강요나 억지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삶을 살길 바라신다.


그래서 엄마는 말씀하신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가난이, 빚이, 당신의 자식들의 부담이 되지 않기를. 당신의 가난은 당신만의 것으로, 그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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