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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May 08. 2021

가난은 유전이 아니라 개성이다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아서 - #끝

엄마와 아빠의 가난의 시작은 어디었을까? 친조부모님께서도, 외조부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가난하셨다고 들었다. 말하자면 그 옛날 전쟁통 속에서 보리고개 넘나들며 살아남았던 그 시절의 가난 말이다. 그럼 엄마와 아빠의 가난의 시작은 당신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으로부터 내려온 유전이었을까? 가난은 과연 유전일까?


나에겐 세 살 많은 오빠가 있다. 오빠와 나는 한 배에서 태어나 비슷하게 생겼고, 한 집에서 자라나 같은 집안의 풍경을 보며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다. 우리가 함께 나눈 유전자의 특성에는 '가난'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이런 말을 했었다.


"난 다시 태어나면 서민 집안에선 절대 안 태어나."

"엄마랑 아빠가 돈이 조금만 더 많았어도 내 삶이 달라졌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아빠가 멋쩍게 웃으며 담배를 피러 밖에 나가시는 뒷모습을, 그 말을 들은 엄마가 "그럼 부잣집 가서 아들 해"라고 서운한 티를 팍팍 내시는 모습을 봤다. 일찍이 경제학 도서를 전문가 수준으로 섭렵했다시피 했던 오빠였기에 부자 되는 법이 가득 담긴 책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아쉬웠을까. 돈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부모님께서 조금만 더 좋은 집에서 살았더라면 오빠의 삶이 조금 더 좋아졌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난해졌다고 해서 정말로 오빠와 나의 삶에 치명적인 결함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궁금한 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우리집이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오빠는 왜 부모님의 가난으로 자신의 삶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지,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났느냐는 것이다. 부모님의 가난이 당신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으로부터 유전되어 온 것이라면 부모님의 가난 또한 오빠와 나에게 유전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오빠와 나는 각자가 느끼는 같은 부모의 가난을, 같은 집안의 가난을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한 배에서 태어나 한 집에서 자랐고, 같은 집안의 풍경을 보며 같이 살고 있다. 좋은 수트를 입고 현금 뭉치를 들고 다니시던 아빠께 함께 용돈을 받았고, 아빠의 사업이 망한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와 아빠가 서로 쓰레기를 던져가며 돈 때문에 싸우시는 모습도 함께 보았고, 좋은 신축 아파트에서 좁은 구식 아파트로도 함께 이사를 갔으며, 무너진 집안 살림 위에서도 낮밤 가리지 않고 일하시는 부모님의 노고도 우리를 위한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같은 부와 가난을 겪었다.


나의 가난의 뿌리를 찾겠다는 결심은 가난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축복의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사는 공간이 비좁아졌어도 먹는 끼니의 질이 달라지지 않았고, 남들 모두 겪는 사춘기를 나만 특별한 듯이 유세를 부리며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어도 부모님께선 용돈 한 번 밀려 주신 적이 없었다. 나는 그랬다. 우리집의 가난이, 부모님의 가난이 나라는 개인의 인생에 큰 요소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게을러서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지 않을지언정 가난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 방 맞은편에 오빠가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마주보며 같은 모습인 양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가족이라는 가운데 기준점을 사이에 두고 서로 완벽히 다른 타인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오빠는 가족의 가난이 아쉬워서, 부모님의 과오와 가쁜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경제학에 매료되었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지키고, 가지고 있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불리기 위해 남들 다 하는 로또도, 주식도, 적금도 한다.


오빠는 가난이 싫었다. 부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많은 좌절을 겪은 사람들처럼 획득한 재산을 잃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오빠는 지식을 쌓았고, 여전히 쌓아가고 있는 지식으로 오빠의 재산을 지키며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가난이 싫지도, 가슴 깊숙이 한으로 맺히지도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지금처럼만 가난하다면 지금만큼만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도 잘 살고 싶은 생각뿐이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결심하게 된 건 그래서였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가족이자 친남매인데 같은 가난에 대해 이토록 다르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 가난은 유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긴 모습에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생각, 다른 가치관을 가진 서로 다른 타인인 나와 오빠는 마찬가지로 같은 가난의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경제관을 가지며 각자의 세계를 꾸리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가난이 오빠와 나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엄마와 아빠의 가난은 오빠와 나의 삶에 뿌리일 뿐이지, 우리는 지금 멋지게 자라 각자의 기둥과 가지를 뻗어 잎사귀와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뿌리부터 썩었다고 한들 나무는 자란다. 나의 부모님께서도 각자의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 각자만의 성장을 거쳐 잠깐이지만 부를 쌓았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그 부를 잃었지만 부모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포기하신 적이 없었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은 언제 어디서라도 벌 수 있다. 당장 살아가는 삶이 고달프더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오셨다. 그리고 지금,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지은 집에서 주말마다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다. 부모님께선 당신의 나무를 당신의 노력만으로 이만큼 키워내셨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환경이자 뿌리다. 가난하더라도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애초에 더 부유한 뿌리였다면 더 튼튼하고 멋진 나무로 자랄 수 있겠지만 이미 가난한 뿌리를 뽑아서 부유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뿌리 위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만의 나무를 가꿔 자라게 할 수 있다. 오빠가 경제학 박사가 될 기세로 책을 읽는 것도, 내가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는 것도 각자의 나무를 자라나게 하는 각자의 개성이다.


가난은 유전이 아니라 개성이다. 가난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던 축복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부모님의 가난이 우리집을 가난하게 만들었지만, 부모님의 가난 때문에 오빠와 내가 가난하게 산 건 아니었다. 오빠는 우리집의 가난이 싫다고 했지만 그래도 인정할 것이다. 오빠와 나는 단 하루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본 적이 없었고, 사고 싶은 물건을 못 사서 부모님을 졸라본 적도 없다. 단지 오빠는 거기서 더 욕심이 날 뿐이고, 나는 여기서 더 욕심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당신의 가난으로 자식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계신 부모님의 노고이고, 그 노고를 자식인 우리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가난의 뿌리를 찾겠다고 했을 때 나는 이렇게 썼다. 태어난 생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을 통해 삶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이다. 그 생의 탄생과 우리집을 둘러싼 가난의 형체를 알았다. 그리고 그 가난이 결코 나의 가난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이제 나는 나의 삶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부모의 가난을 뿌리 삼아선 안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가난'은 오롯이 나의 가난이고, 나의 책임이며, 나의 삶이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끝내 놓지 않으셨던 삶을 향한 생의 노력을 배워야지.


자, 나의 나무를 가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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