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멀리 간다

언니, 오늘만 좌절해

by VIVA

5분 남았다는 방송이 나왔다.

눈이 침침한 걸 넘어 앞이 깜깜해졌다.

부정맥이 오는 듯 심장이 제멋대로 둥둥거린다.

1분 남았다는 방송이 나왔다.

컴퓨터 수성 사인펜을 내려놓고 소리 없이 길게 호흡을 내 쉬었다.

뒷목이 땅기고 어질 어질 하다

이럴 수 없다고 부인하는 마음이 솟구친다.

거의 20년 만이다, 컴퓨터 수성 사이펜으로 OMR 카드를 작성한 게.

문제지와 시험지가 앞으로 전달되고

수험장을 나오면서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떤 표현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포괄적인 좌절이었다.

온몸이 꼴뚜기가 된 듯 흐물거렸다.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학생 시절, 오답 노트가 있었다.

나의 두뇌가 지나치게 문과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나의 오답 노트는 대부분 어문계열이었다.

국어, 영어, 독일어. ( 프랑스어는 20대에 합류)

오답 노트와 짝꿍을 이룬 건 단어장이었다.

여기에 깍두기까지 껴준다면, 문법정리장이라 할 수 있겠지.

그때 만들어 놓은 문법 노트와 단어장의 표지는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어렸을 때 내 머리는 시험을 위해 완벽하게 세팅된 두뇌였다.

그때는 시험을 잘 보면 공부를 잘하는 거라는

완벽한 등가의 법칙이 통용되던 때였다.

물론 지금도 학생들에게 이런 기준이 여전히 적용되겠지만

대학생도 아니고 진짜 어른이 되어하는 공부는

이와 다르게 통합적인 이해와 재구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배움이란 사실 매우 보수적인 행동이다.

처음부터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정리해 놓은 것, 다시 말해 기존의 질서를

일차적으로 수용을 하는 것이 교육이고 배움이다.

교과서, 책, 선생님, 멘토, 선배들의 기록과 경험을

우선은 이해와 암기의 과정을 통해 수용하고

이후 나의 몸과 영혼에서 필터링이 되면,

그때 나의 정보와 지식과 지혜로 만들어진다.


나는 이런 어른 공부를 참으로 좋아한다.

책과 기록물을 먼저 읽고 그걸 내 삶에 적용하거나

또는 내 삶에서 먼저 경험한 것을 타인의 기록과 비교 검토 하는 방식.

그걸 통해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기 객관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하는 거.


그래서 내 또래, 학교 다닐 때가 젤 좋았다는 말에

일부는 공감하고 일부는 공감하지 못한다.

학교 다니면서 한 시험공부는 지금까지도 소스라치게 싫고

순위 매김과 경쟁 속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이 치 떨리게 싫어서

지금 같은 나만의 속도로 자기 주도적인 공부와 배움이 좋다.


삶과 경험과 합쳐진 나만의 오답 노트를 적어 나가는 일은 희로애락 그 자체다.

때로는 까만 볼펜으로 구멍이 날 정도로 찍어 내린 흑역사의 기록도 있고

봄날의 벚꽃으로 하늘 거리는 감성으로 가득 찬 페이지도 있고

핏빛으로 물든 나만의 살생부도 있고

자기 객관화를 핑계로 비현실적인 비하와 망상을 오간 널 띄는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 반성과 질문과 그 대답을 혼자 주거니 받거니 한 기록들이다.

나만의 세상에 빠지지 않으려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왜곡하지 않고

자기반성 없이 세상 탓하며 순간 편할 수 있는 자기 파괴에서 벗어나려면

오답 노트는 나에게 필수다.

그리고 그 노트에 빨간 줄로 팍팍 그어 버린 일이 오늘 일어났다.



나는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다.

협업이나 분업이나 아웃소싱 없이 오롯이 혼자 다한다.

프리랜서, 쉽지 않다. 자기 주도적인 일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때로는 너무 넘쳐나는 시간에 버거워 우울해지거나

때로는 너무 없는 시간에 숨 막히거나 극단을 오간다.

프리랜서와 정기적인 일을 결합해 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매번 요일을 지켜 글과 소설을 쓰고 있지만

작년부터 완전히 다른 마음이 솟아났다.

방구석 작업실에서 벗어나는 거 어떨까?

거의 5년 전에 몽글몽글 피어났던 마음이다.

그때는 마음만 있었을 뿐 안전지대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세상과 갈등 피해 죽은 듯 산 듯 책 읽기로 공허를 채워 나가기만 했더랬다.


눈으로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계속 생각했다.

비주류, 그림자, 수도승 같은 삶을 일부 포기하고

타인과 함께 기존 질서에 편입하여 배움을 얻어가는 건 어떨까?

내가 할 수 있는 거,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책 읽기 뿐인데

책 읽기를 배움과 연결하는 건 어떨까? 그것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기존 질서에 편입하려면 그들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영어와 제2 외국어 시험이었다.

그것도 2년 안팎의 유효기간이 있는 시험성적이다.

20년도 넘게 묵어 버린 내 스펙 결과지는 말 그대로 앨범에 박제할 추억이거나

종이 분쇄기에 갈아 버려야 할 폐지일 뿐이었다.


아무리 외국어를 전공했다 해도,

외국에서 여기저기 일하고 체류했다 해도,

내가 외국어 관련 책을 쓰고 일대일 교습을 하고 강의를 했다 해도,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는 객관적인 지표가 되지 않는다.


'외국어 스펙 시험이라니! 안 하련다. 귀찮다'


나의 푸념을 듣던 내 삶의 바람잡이, 나의 애착 인간 동생이 웃는다.


'죽기 전에는 하겠지'


그렇게 화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는데,

그날 밤 나는 인터넷으로 덜컥 시험 신청을 했다.

나를 마라톤의 세계로 바람몰이했던 그녀는

나를 배움의 입구턱까지 끌고 갔다.

나는 엄마한테 자주 말한다.

이 세상에 동생이 젤로 무섭다고.

죽는 순간까지 내 곁에 있을 존재이기에

그 친구와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동생이 너의 조련사야'


나의 조련사 동생 덕분에 시험을 신청하고

거의 한 달 정도를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

그 흔한 모의 테스트도 하지 않고

서점에서 기존 문제집과 설명집을 쓱 흩어 보면서

'라떼'와 다를 바 하나 없다고,

시험풀이기계였던 '과거' 능력에 부풀려진 자아에 취해 있었다.




청해 부분이 시작되었다.

통역을 할 때면 특정한 주제가 있고,

거기에 대한 배경지식을 사전에 준비해서

거의 한두 가지의 주제로 이야기가 관통한다.

그런데 세상에나, 뭔 이거 말했다 저거 말했다 왜 이렇게 산만해?

카페에서 떠들어도 저렇게는 대화하지 않겠다 투덜거리면서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점점 쇼츠나 릴스보다 더 정신 사나워져서

입력과 출력의 시간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분명 들었고, 내가 아는 말인데, 방금 저 사람이 뭐라 말했지?

들었는데 왜 기억을 못 해, 왜 기억을 붙들어 놓지 못하는 거야?

단기 기억 상실인가? 이거 치매 초기 증상인데 '


불안한 마음에 멘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험장까지 걸어갔던 터라

늦겨울 칼바람에 볼따구가 꽁꽁 얼었다가

온풍기 바로 밑 자리에 배정되

얼굴이 벌겋고 뜨겁게 녹기 시작하면서

귀와 목까지 감기가 올 듯 간질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면 안 된다는 필사적인 노력에

눈에 눈물까지 맺혀버렸다.

그러면서 두어 문제를 놓쳐 버렸다.


청해를 넘어 본격적인 활자 문제 풀이가 시작되자,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다.

시험은 문제 풀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 요령은 시간배분과 핵심단어 찾기다.

그 요령을 익히고 체득한 게 중고등학교 때 내가 배운 거다.

난 사실 그 요령이 뼛속 깊이 체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번역을 오래 한 습관으로

나는 원문을 정말 천천히 읽는다. 아주 꼼꼼히 문장을 분석하다.

번역의 길에 들어선 이후, 재미로 눈으로 쓱쓱 읽는 일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즐거움을 책임과 의무로 환치할 때 생기는 의무감과 부담은 어쩔 수 없다.

한량 같은 느릿한 속도의 정독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다니!


나만의 속도로 걷고 있는데 뒤에서 정체불명의 군중이 우루르 뛰어 온다.

영문도 모르고 나도 그들과 함께 숨이 넘어갈 정도로 뛰어갔다.

딴생각하면 안 되는데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자주 말했던

'인민군 몰려오듯' '전쟁통에 한강다리 건너듯' 표현이 떠올랐다.

'할머니, 제가 허둥거리는 모습 우습죠?'

조용한 수험장에는 젊디 젊은 수험생들의 문제지 넘기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리고 그들이 문제지를 넘기는 속도가 어마 어마하다.

모두가 나를 추월하고 다시 들판에 나만 남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집중력이 떨어져 몰입은커녕

활자와 의미가 겉돌면서 입력에 오류가 발생했다.




수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Brain Rot'이라는 단어만 맴돌았다.


오늘부터 당장 모든 릴스와 쇼츠를 끊고

디지털 디톡스를 확실하게 해서

내 기억력과 몰입력을 다시 키워야겠어.'


하지만 이런 호기로운 다짐 밑에는

나의 근본적인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더는 빠릿빠릿하게 문제를 풀지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한 실망은

사실상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몸매가 외계인처럼 변하고

머리숱이 줄어들어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 능력의 퇴행을 이렇게 뼈아프게 체험하고 나니

희망보다는 두려움에 허리가 쪼그라들었다.

배움의 문 앞에 용감하게 섰는데

그 앞으로 치매의 두려움이 함께 펼쳐지다니

죽기 전에 후회 없이 한번 해보려는 애틋한 도전에

죽음의 그림자가 펼쳐지다니

단 한 번도 느끼거나 생각해 보지 못한 내 노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나의 애착 인간 어찌 그리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상상에 상상이 더해져 한없이 부풀러 오를 즈음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좋은 경험이지, 나를 알게 되는 경험!'


그리고 재빨리 투덜이 모드로 변한 나에게 브레이크를 건다


'또 멀리 간다, 좌절 금지, 아니 언니 오늘만 좌절해, 내일 또 전진할 테니까'


급노화가 온 듯 멍하게 소파에 앉아 있다.


'겨우 2시간 문제 풀이하고 체력 방전이라니

자기 객관화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꼴좋다.

O산과 O서를 헷갈려서 수험장으로 배정된 학교를 헤매질 않나,

시험이 토요일인데 일요일이라고 혼자 우기질 않나.. 아휴, 늙었다. 늙었어'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80 중반을 넘은 아빠의 표정과 똑 닮았다.

아직 한창이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술자시고 들어오는 마음만은 젊은 아빠.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날은 젊었을 때 보다 더 많은 좌절 투성일 거다.

좌절과 실망과 착각 속에서 현실과 시대에 맞춰

보정하고 수정하면서 기억을 붙들려는 사투일 것이다.

그 사투하고 있다는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진짜 늙은 거겠지? 그럼 나도 아빠도 아직은 괜찮잖아.

그러니까 벌써부터 좌절하지는 말자.

실컷 좌절했으니, 지금부터 좌절 금지다.

더 늦기 전에 한 번 해 보는 거지 뭐, 까짓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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