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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a kim Dec 18. 2019

바디로션 바르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이 글은 뷰티 팁이 아닙니다

바디로션 바르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 이 글은 뷰티 팁이 아닙니다




하루 일과를 마쳤다.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쥐어짜서 헬스장에 다녀온 날은 헬스장에서, 어깨 위 피로 곰에게 패배한 날은 털레털레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한다. 물에 젖어 부피가 2배는 더 커진 것만 같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 수건으로 대충 올려 묶고 바디로션을 꺼낸다. 이때만큼은 만수르가 된 것처럼 아끼지 않고 짠다, 바디로션을. 종아리부터 발등, 허벅지 타고 올라와 겨드랑이까지 꼼꼼하게 쓰다듬어준다, 바디로션을 바르면서.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나는 바디로션 바르는 시간을 좋아한다.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하며 씻었을 때에도 바디로션을 바르지만 사실 그때는 즐길 겨를도 없이 빛과 같이 바른다. 그러니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잠자기 전, 바디로션 바르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바디로션 바르는 것을 귀찮아했다. 바르면 몸이 미끈덩거리고 그 위에 옷을 입으면 다 묻을 것만 같아 찝찝하다고 생각했다. 안 발라도 되는 그것이 어리고 젊어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 아침에 자고 일어난 베개 자국이 사라지는 게 점점 오래 걸리기 시작하자 필요에 의해 바디로션을 찾았다. 바디로션의 순기능을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한 보습, 그 이유 하나. 아침이고 저녁이고 상관없이 한 두 번 짜서 슥슥 바르고 몇 초 만에 끝냈다. 그보다 좀 더 정성을 들여, 보습이 아닌 다른 이유로 내 몸을 쓸어내게 된 계기는 화장품 브랜드 LUSH에서 마사지바를 사고 난 이후부터다.


몇 년 전, 런던에 여행을 갔었다. 브랜딩을 잘하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나는 응당 영국에 왔으면 LUSH 매장에 꼭 들려봐야 했다. 제품 하나하나를 본인이 더 신나서 자랑하고 설명하는 스텝들, 매장 곳곳에 적힌 멋진 카피들,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시스템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각 제품들의 스토리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장에서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처럼 놀고 있었다. 물론 장바구니에도 척척 담아가면서. 그러던 와중에 한 직원이 바디 제품을 보고 있던 내게 마사지바를 추천해줬다. 마사지바라는 것이 다른 회사 제품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체 형태의 바디밤 같은 건데, 비누같이 생긴 것을 쥐고 몸을 슥슥 쓸어 체온으로 녹여 바르는 제품이었다. LUSH 브랜드는 좋아하지만 내 몸은 하나이기에 모든 제품을 다 써보지 못했던 나로서 마사지바는 생소하기도 하고, 처음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저걸 보관하려면 틴케이스도 사야 한다고 하고, 체온으로 녹인다니 뭔가 흡수가 잘 안 되는 기름진 질감이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안 써봐서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내게 그 직원은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이 제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물론 보습의 기능이 뛰어나서도 있지만, 바르는 동안 내가 나를 돌보고 다독이는 기분이 들어 다음 날 더 행복이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며 장바구니에 담아봤더니 계산하면서 조언을 더해줬다. 이 것을 쥔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고 나를 만져주라고. LUSH는 진정 스토리텔링의 대가구나라고 속으로 껄껄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가져온 여행용 화장품을 꺼내려다가 내가 아시안 호갱이 된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마사지바를 꺼냈다. 마치 반달돌칼을 쥔 원시인처럼, 한 손에 마사지바를 쥐고 의자에 앉아 종아리부터 천천히 쓸어 문질렀다. 그러다 보니 내 발등을 자세히 보게 됐다. 어라, 여기에 점이 있었구나. 신기하네. 어휴,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발이 퉁퉁 부었구만. 그래도 런던 너무 좋다. 허벅지로 올라가면서 내 무릎의 뒷면도 보게 됐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무릎의 뒷면에 초점을 맞춰본 때가 아녔을까 싶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배로 올라왔다. 유치원생일 때 맹장수술을 받아 꿰맨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입원하면서 많이 울고 말 안 들었는데. 나 혼내랴 병시중 들랴 엄마는 꽤나 짜증 났었겠네. 이런 식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온몸을 마사지바로 바르면서 쓸어냈더니 몇 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따뜻한 이불속에 들어와 누우니 몽글몽글 녹은 버터처럼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는 사는 게 바쁘다고 신경 쓰지도 않는 내 발뒤꿈치 같은 부분을 내 손으로 다 어루만지고 나니 LUSH 직원이 말했던 돌보고 다독이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저녁에 씻고 난 후엔 정성을 들여 바디로션을 바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바디로션을 바를 때마다 생활습관이 무너져 찾아온 건강하지 못한 신체의 변화도 직면하기도 한다. 이렇게 꼼꼼하게 바르면서 내 눈으로 다 봤는데 모른 척 하기엔 너무 양심에 가책을 느껴 괜히 에이-하고 한 대 찰싹 때리기도 해 봤다. 물론 좀비처럼 들어오면 로션 짤 힘도 없어 넘어간 날도 많지만 그러면 확실한 건 다음 날이 덜 행복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 없도록 다음엔 더 구석구석 살피고, 봤던 곳도 또 한 번 애정을 담아 터치를 하게 된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 쓰다듬는 것이 주는 위로와 안정은 카더라가 아닌 과학이 이미 밝혀낸 사실일 것이다. 평소엔 바디로션을 바르다가도 유독 더 힘들었던 날이나 더 큰 사랑을 주고 싶을 땐 아껴두었던 마사지바를 꺼낸다. 처음 느꼈던 그 마음을 떠올리면서 슥슥.


세상살이가 힘들고 스스로에게 거창하진 않지만 확실한 위로와 힘을 주고 싶다면, 나는 바디로션 바르는 시간을 좋아해 보라고 추천한다. 이 글은 뷰티 팁이 아니다. 아, 이 글은 뷰티 팁이 될 수도 있겠다. 나를 바라봐주고 관심 가져주는 이너뷰티 팁. 뷰티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엔 살짝 오그라들지만 정신건강에 좋은 건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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