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 Aug 10. 2020

'더 시골' 생활 시작

'더 시골'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다

지금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산다. 서울 기준으로 보면 이미 시골에 살고 있었지만, 이번에 '더 시골'로 이사 갔다. 그간 나는 유년시절 잠깐 1년 정도 주택 2층에 살아본 경험 빼고는 줄곧 아파트에서 살았다. 우리나라 국민 2명 가운데 1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아파트로 가장 많이 이사 가고 앞으로 살고 싶은 집으로 반 가까이 아파트를 꼽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저 이때껏 편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형태이기에, 아파트 생활만 해온 것이 지겨워졌다고 해야 할까. 30년 넘게 아파트에서 살았으니 (아이가 어렸을 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론까지 더해) 한번 불편하더라도 다른 주택형태인 단독주택을 가꾸며 살아보고 싶었다. 물건처럼 사서 쓰다 낡으면 버리고 다른 새집을 구하는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이 내 의견에 따라주었고 우리는 시내를 살짝 벗어난 시골이라 볼 수 있는 곳에, 일터와 아이의 학교 그리고 스스로 관리 가능한 집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1충짜리 아담한 집으로 결정했다. 집을 구하고 이사 오기 전 주변의 반응은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내용들이 많았다.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는 사람 많다더라. 고생을 꼭 직접 해봐야 알겠니. 등등. 또한 그들의 말에 너무나 쉽게 흔들리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고생하더라도 내가 살아보고 싶다는데 한번 살아보자.’ 싶어 결정을 한 지 9개월이 지나 진짜 이사를 왔다.




이삿날 당일 아침, 낯선 전화번호에 잠이 깨 허둥지둥 문을 열어주면서 포장이사 직원 4~5명의 폭풍 짐 싸기가 시작되었다. 밖을 보니 어라. 비가 온다. 넋 놓고 있다가 이사철인데 싶어 이삿짐 센터에 연락해보았더니 남은 날짜가 직원들 쉬려고 남겨두었다는 2월 19일. 그렇게 간신이 잡은 이삿날에 비가 온다. 이사 가기 전 버릴 거 다 버리고 가라는 조언에 책과 창고의 물건들을 많이 버리긴 했어도 아직 버릴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3시간 남짓 짐을 싸서 이삿짐 차에 싣고 오후엔 비가 더 많이 온다는 예보에 점심도 거르고 이사 갈 집으로 짐을 바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새집에 짐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싸온 짐을 풀 데가 없는 거다. 이런. 아파트가 숨은 수납공간이 많은 거였구나. 평수도 줄어든 데다가 붙박이로 있던 장롱과 책장 선반 등을 놓고 오니 물건들을 넣을 데가 없어 아이방에 결국 비닐 째로 놓고 가셨다. 그나마 창고가 있어 다행이었다. 후. 기분이 이상했다. 집을 보통 늘려서 이사를 가지만 우리는 좁아진 데로 이사를 와서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포장이사의 묘미를 살리지 못한 채 정리할게 산더미 같은 집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건들을 넣기 위해 가구를 새로 사넣어야 할 지경이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이사를 오기 전까지 뭔가를 수납하기 위해 가구를 사는 것은 싫다고, 수납할 것을 없애가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수많은 갈 곳을 잃은 물건들을 보고는 무릎을 꿇어버렸다. 거실과 부엌에 수납장을 하나씩 사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아파트에서는 있었던 것이다. 붙박이라 그것을 두고 왔으니 물건도 두고 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수납공간이 더 필요한 거다. 일단 더 버려보기로, 버리는 데도 에너지가 많이 든다. 제발 사는 것을 더 고민 고민 끝에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된다.



기왕에 시골로 이사 오는 것이니 주변 이웃들에게 인사드릴 때 나눠드릴 떡을 맞추었다. 앞집 할머니 댁, 옆집 한옥집, 반대쪽 옆에는 빌라가 있는데 애매했지만 고민 끝에 나눠드리기로 하고 주변에 자주 가는 식당, 딸이 앞으로 다니게 될 미술학원, 약국, 마트, 편의점 등 가게와 떡이 남을 것 같아 경찰서, 면사무소, 심지어 소방서까지 나눠 드렸다. 우리 세 가족이 떡을 건네며 이사 왔다고 하면 젊은 분들은 반응이 거의 “웬 이런 걸.”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반면에 어르신들은 잘 오셨다고 즐거운 일 많이 있으시길 바란다고 덕담해 주시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 딸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나눠주시는 통 큰 식당 사장님도 계셨다. 나도 요즘 시대에 이사떡이라니 싶은 생각이 조금은 있었는데 그래도 안 하는 거 보단 하길 잘한 것 같다. 인사하는 건 중요하니까.



2월 19일은 안 오던 비가 엄청 온 날이기도 하지만 정월대보름 날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엔 동네 초등학교에서 주최하는 정월대보름 한마당 행사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우리 세 가족은 이웃들에게 인사드리고 행사가 열리는 초등학교에도 가보았다. 비가 와 행사가 축소 진행되어 아쉬웠지만 마을에서 준비해주신 나물밥과 된장국을 (우리끼리 먹긴 했지만) 나눠주셨는데, 이사 온 날 아침과 점심도 못 먹고 일하던 우리 부부에게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밥을 나눠 먹는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그런지, 워낙에 허기져서 그런지 유난히 더 맛있고 소중한 한 끼였다. 감사히 식사를 마치고 이미 어두워진 밖에서 줄을 서서 받아먹는 군고구마를 먹으며 달집 태우기를 기다렸다. 예상을 깨고 달은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달집 태우기를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했는데, 멀리서도 얼굴이 따뜻할 정도로 불길이 높고 컸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며 각자의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니 느슨한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처음 이사 와서는 이것저것 어수선한 게 많아서 마음속 걱정이들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다 그날 저녁 그만 딸아이에게 짜증을 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평소보다 심하게 굴었다. 그랬더니 딸이 혼잣말로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하는 거다. 확 정신이 들었다. 딸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방금 한 말을 확인하며 미안하다고 사죄를 했다. 내가 왜 이사를 왔나. 결국은 즐겁게 살려고 온 건데 당장 좀 불편하고 걱정된다고 ‘지금, 여기’를 부정하면 안 되는 거지.

오늘로 이사 3일 차다. 조금씩 아파트를 벗어난 것이 실감 나기 시작하고 차차 적응도 되는 것 같다. 어제까진 정신없다가 그래도 이 불편함이 익숙해지면 그건 살만할 것이란 긍정적인 생각이 살포시 들었다. 더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기존 통신사는 인터넷 설치 불가능 지역이라 한다. 그래서 새로 인터넷 가입을 해야 하는데, 물론 큰 금액이 아닐 수 있지만 36개월 약정에 매이는 것도, 매달 고정 지출이 또 하나 느는 것도 싫었다. 집이 와이파이 존이 되면 핸드폰 붙잡고 있는 시간만 더 늘 것 아닌가. 핸드폰에 기본 데이터가 있으니 그것만 쓰고 지금처럼 다 떨어지면 인터넷에 덜 접속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만큼은 핸드폰보다 가족과의 관계와 집 안팎을 가꾸는데 초점을 두는 삶을 살고 싶다. 와이파이 존이 아니면 어떠랴. 기왕 시골에서 불편하게 살기로 한 것. 오프라인에 더 충실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단 인터넷 설치는 미뤄두었다.




 사실 아직도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살던 집은 거래가 되지 않아 비어있고, 이사 온 집에 수도가 말썽이라 큰 공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집의 작은 부분을 바꿔가며 남편은 하루에 몇 번씩 실패를 맞이하다가 또 해냈을 땐 작은 성취감에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출렁인다. 오늘 아침엔 딸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재잘재잘 떠들더니 화장실에 쉬를 하고 나와선 이야기한다. “엄마, 우리 집 화장실 좋은 게 있어. 쉬하는데 새가 짹짹거려.” 그렇지! 이런 삶의 태도다. 또 어린 딸에게 깊은 배움을 얻는 순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