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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Aug 10. 2020

호사스러운 출근길

2019년 4월 어느 날의 출근길

 4월의 어느 날 불현듯 느꼈다. 내가 요즘 얼마나 출근길을 즐기고 있는지. 그날 아침에도 시골길을 지나와 막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타던 때, 갑자기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집으로 이사오지 않았더라면 매일매일 온몸 다해 달라지고 있는 계절의 변화를 가까이서 느끼지 못하고 그저 어렴풋이 추측하며 아스팔트 2차선, 3차선 도로에서 앞 차 꽁무니만 보며 다녔을 것 아닌가. 나의 아침, 잠에서 깨어 출근하기까지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세 식구 중 가장 먼저 잠에서 깬다. 내 핸드폰 알람 소리는 매우 은은하기 때문에 나만 들을 수 있(는 건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는 모른)다. 알람을 끄고 씻는다. 원래 아침식사는 생략해왔기에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얼굴에 화장품을 조금 찍어 바른 다음 식탁에 잠깐 앉는다. 평소보다 여유가 좀 있어 읽고 있던 책 중 하나를 꺼낸다.

‘김혜형’의 <자연에서 읽다>인데 이 책은 이사 온 시골의 단독주택의 식탁에서, 특히나 다른 식구가 깨지 않은 아침에 읽기 좋다. 태어나서 도시에서만 살던 저자가 ‘가슴속 열망을 주체 못 하고 삶을 통째로 뽑아 자연으로 옮겨’가 겪은 이야기다. 자연에서 얻는 선물 같은 순간들을 묘사한 책이다. 우리 가족도 이 곳에서 첫 봄을 맞이하여 주말에 집 뒤 텃밭에 이것저것 심어둔 터라 책 내용이 실용서처럼 읽힌다. 책에서 추천해준 식물도감 제목을 따로 적어둔다. 출판 편집자의 글솜씨와 예민한 감수성에 새겨두고 싶은 말 투성이다. 오래 읽지는 못해도 아침 먹는 대신 잠깐 앉아 곰곰 그의 글을 되뇌고 보면 남편이 깨어난다. 나보다 일찍 출근함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늦게 일어난다. 준비시간 10분도 되지 않아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이제 딸을 깨워야 할 시간이다.

몇 번 아이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야 부스스 눈을 뜬다. 하지만 자세를 바꾸어 다시 잠을 청하는 딸을,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번쩍 들어 올려 식탁 의자로 데려다 놓는다. 한참을 잠에서 못 깨어나 꿈뻑꿈뻑거린다. 밥 먹을래? 물으면 언제나처럼 응, 이라고 하고는 이내 쉬가 마렵단다. 갖다오라는 대답이 떨어져야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의자에 앉는다.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서 입에 떠 넣어준다. 아무리 늦어도 아침을 거르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식사가 끝나면 옷을 입히고 고양이 세수만 해준다. 부스스함을 지우지 못한 채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열쇠로 돌려 잠그고 마당의 변화를 눈으로 한번 훑는다. 이번 봄 처음으로 목련꽃이 피던 때는 하루하루가 감탄 거리였다. 이제 제법 화단의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나고 있다. 라일락, 철쭉, 붓꽃, 이름 모를 꽃들과 우리가 심은 안개꽃과 미니 카네이션, 팬지꽃도 그 자리에 있다.  

허술한 대문을 닫고 대문 밖에 주차된 차에 올라탄다. 현관문을 나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시간이 아파트에 살 때보다 훨씬 짧아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도, 주차할 자리가 없어 멀리 주차된 차를 찾으러 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늘어난 건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데까지는 등교시간이라 초등학교, 중학교 앞 차들이 평소보다 복잡하긴 하지만 워낙 거리가 짧아 조금만 유의하면 괜찮다. 초등학교 교문 옆쪽으로 차를 세우고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 뒤편의 병설유치원까지는 걸어간다. 웬만큼 유치원이 보이면 헤어질 법도 한데 아이는 내 손을 놓칠세라 꼭 붙잡고 선생님을 만나서야 어렵사리 내 손을 놓는다. 내가 마음이 급해 아이를 일찍 떼어내 보내려면 더 안 떨어지려 한다. 내가 느긋이 아이를 보내면 순순히 헤어진다. 아침의 조급함은 대체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는 이제 오롯이 나만의 출근길을 달린다. 왕복 1차선의 시골길이다. 직진-좌회전-직진-우회전-좌회전하면 자동차 전용도로가 나온다. 자동차 전용도로에 올라타기 전의 시골길을 좋아한다. 차들이 많이 없는 편인데 트랙터나 교육청 버스 등 유난히 천천히 달리는 차는 비상등을 켜고 추월하기도 한다. 신호는 없지만 과속방지턱이 상상 이상이다. 내가 달리는 직진 길에선 2개가 가장 강력한데 그중 하나는 특히 그냥 아스팔트 색과 같아서 무심코 달리다가는 바퀴가 펑크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격이 크다. 초반엔 과속방지턱에서의  속도 조절에 시행착오가 많았다. 이젠 그곳이 어딘지를 알기에 미리 속도를 30km/h 이하로 줄인다. 가는 길 오른편으로 커다란 비석(?) 위에 마을 이름이 쓰여있다. ‘금광마을’, 증석마을’, ‘오산촌마을’, ‘경창마을’, ‘대차마을’. 마을이정표 앞에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있기도 하다. 내가 그날 일찍 나왔는지 늦게 나왔는지 가늠할 수 있는,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남매의 모습이 보이면 안심이다. 이들을 보고 나면 한결 느긋해진다.

버스정류장에 앉아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뒤로 오래된 벚꽃나무가 장관이다. 도로가 아닌 논과 밭 쪽으로 가지가 길이길이 뻗어 하얀 꽃들이 어찌나 소복이 피었나 모른다. 이번 해엔 유난히 천천히 피고, 천천히 지는 벚꽃을 3주 가까이 감상했었다. 만개하는 시점이 어찌나 더디던지. 여기 벚꽃은 4월 17일이 절정이었을 거다. 왜냐하면 4월 18일 아침의 벚꽃 세례가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져 날리는 꽃비에 한번,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바닥에 떨어졌다가 달리는 내차 때문에 일어나는 꽃파도에 두 번, 감탄하며 그 길을 통과했다. 그 후 며칠간 다 떨어질 때까지 날리는 꽃잎과 함께, 출근하는 건지 여행을 떠나는 건지, 들뜬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
한동안 ‘벚꽃 복지’를 한창 누릴 때는 도착해서도 주차된 차위로 떨어졌다. 꽃잎을 밟으며 유난히 파아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그날따라 깨끗한 공기도 깊이 들이마시고 출근한다.

너무 감상적인가. 물론 매일 아침이 이렇게 여유 넘치게 흘러가는 건 절대 아니다. 사실 아이의 컨디션과 나의 컨디션 등 여러 가지 상항에 의해 촉박하고 조급할 때가 더 많다. 꾸물대는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후회가 몰아쳐 우울한 출근길도 있고, 잠을 충분히 못 자서 아침부터 피곤에 절어 출근하기도 한다(요즘들어 경창마을의 그 남매를 잘 못 본다). 하지만 반짝이는 순간을 만날 기회가 더 많은 건 맞다. 서울이나 대도시의 교통상황이라면, 아니 대도시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몇 개월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출근할 때도 끌어내기 힘든 감성이니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 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새나 꽃, 나무와 풀들에게 미안하다. 우리 집 마당에서부터 시작해, 각 마을을 지나는 꽃, 나무, 논밭 그리고 하늘로부터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며 하루하루 다른 아침을 구별하여 기억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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