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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미 Apr 15. 2022

2022-03

걷고 달리며 종종 남겨둔 기록

*03-01-화

오늘로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꼭 한 달이 되었다. 정확히 입으로 다이어트는 작년부터였지만.. 운동과 식단을 본격 병행한지 이제 딱 한 달째. 워낙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터라 금주라는 치명타 외에는 다행히 아직까진 큰 고비는 없다. 간혹 샐러드 주문할 때 굳이 소스 따로 달라고 해놓고선 정신 차리고 보면 찍먹으로 싹싹 비우곤 하지만 샐러드니까.. 그렇게 자주 눈감아 주며 한 달이 지났다.

3월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공기부터 온화해졌다. 이렇게 때맞춰 부지런히 계절을 전해주는 절기의 변화는 새삼스레 매번 신기하다. 간밤 사이 내린 봄비 냄새를 맡으며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달리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흙바닥에서 달리는 건 꽤 오랜만이었는데도 몸이 그때의 리듬감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규칙적인 호흡만이 울려 퍼지는 이 공간이 너무 평화로워서 이 세상에 여기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호흡을 고르며 물을 마시는데 행복과 감사함이 밀려왔다. 달리기를 마치고도 한참을 바닥에 앉아 일광욕을 하다 돌아왔다. 나뭇가지 끝에도 찾아온 이곳의 봄기운이 지구 반대편에도 깃들길 바란다.


*03-03-목

재택근무 중 목요일 오후 2시. 오늘은 한창 볕이 좋은 이 시간에 일부러 달리러 나왔다. 벌써 몇 분째 같은 문단을 붙잡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내가 지겨워서, 머리 대신 몸이라도 좀 움직여보자 싶었다.

2시의 운동장은 아직은 찬 기운이 도는 바람과 직사광선의 쨍쨍한 콜라보~ 4km의 음지와 양지를 오갔더니 몸도 머리도 과메기마냥 촉촉 말랑해졌다. 빨갛게 익은 얼굴을 씻어내고 아아메를 들이키며 심기일전. 도무지 읽히지 않아서 잔뜩 미뤄뒀던 대본들을 모두 읽었다. 주어진 시간을 내 효율과 쓸모에 맞춰 쓸 수 있어 재택근무는 대체로 아름답다.


*03-13-일

어제부터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지금 생각해보면 코로나 전조증상이었던 듯) 두유와 가볍게 응아 산책을 다녀올 셈으로 나섰다. 간밤 사이 시원하게 내려준 봄비 덕에 산불도 미세먼지도 씻겨내려 기분도 청명했다. 처음엔 홍제천까지만 걸어갔다 오려고 했는데 기왕 나온 김에 놀이터까지만 가자 하다가 결국 자주 달리곤 하는 운동장까지 와버렸다.

우리끼리 '운동장'이라고 칭하는 이곳은 실은 누군가 조성해놓은 공터인데, 종종 인근 어르신들이 쉬엄쉬엄 걷기도 하시고 어린이들이 공을 차기도 하고 동네 멍뭉이들의 만남 장소이기도 하고. 내게는 이 동네에서 발견한 유일한 트랙이다. 아스팔트보다는 아무래도 흙바닥이 좋아서 이곳을 택해 달리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비를 흡수한 바닥이 한층 폭신해져 더 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런데이를 켰고 옆에는 강아지 코치가 같이 달리고 있었고 달리다 보니 지난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연대의 런데이 캠페인이 생각나 뒤늦은 3.8km 인증샷도 남길 수 있었다.


*03-15-화

지난주 팀원에게서 퇴사 고백을 들었다. 나는 안다. 권고사직에 가까운 퇴사라는걸. 모두가 알고 있던 비밀이 공공연해진 순간 사무실 공기는 미묘하게 바뀌었다. 이렇게 또 한 명의 팀원을 떠나보내는 내게는 불분명한 죄책감만이 남았다.

오늘 그 친구에게 인수인계 일정을 듣는 동안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결국 사람과 하는 일이라 일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일은 내게 늘 숙제 같다. 종일 읽고 보고 미팅을 하면서도 뭘 했는지 모를 하루가 지났다. 아지랑이처럼 언저리에서 일렁대기만 하다가 퇴근길 버팀목을 구하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어른께 연락드렸다.

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봤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했다.

1년 후에도 지금처럼 느낄 것 같냐고 물으셔서 그건 아닐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괜찮다고 하셨다.

각자의 길로 갈라서는 때니 아쉬워말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다 그런 거라고.

그쵸 맞아요.

우린 각자의 길목에서 어느 때 잠시 만났던 거다. 얼마나 더 같이 걸을지 지금 갈라설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내가 지금 걷는 길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고 달리는 사람들에 감사하고 함께하는 순간을 느끼고 내 보폭을 조율해가며 앞으로 한발 한발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요 며칠간 이미 내 안에서 수없이 다지고 다져왔던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도 앞서 지나온 어른이 건네는 말의 힘은 세다.

운동을 마치고 달리러 나왔다. 미세먼지로 자욱한 밤의 운동장은 칠흑 같다는 말이 체감될만큼 어두웠지만 딱 20분만이라도 지금 달려야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는 목소리를 되새겨 떠올리며 달렸다. 괜찮다 괜찮다 하니 정말로 괜찮아졌다.

따뜻하고도 서늘한 이 환절기의 날씨는 설명할 수 없는 홀가분함과 헛헛함 사이에 놓여있는 요즘의 나를 닮았다. 변화에 발맞춰 모두가 꿈틀대며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달렸다. 집에 와 붕붕 프로펠러 꼬리로 반기는 두유를 품에 꼭 보듬어 안았다. 가슴 언저리가 따듯해진다. 안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샤워를 해야지.


*03-25-금

아! 기다리고기다리던 격리해제의 날.

하필이면 생일 전날 코로나를 선물 받은 탓에 방구석에서 골골대며 이따금 주르륵 서럽기도 했지만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단계를 착실히 지나오며 금세 집순이 루틴을 회복했다. 매일 보양식과 건강차를 마시고(1.5kg 증량..)일상에 쫓겨 미뤄뒀던 영화(9편)와 시리즈(보는 중) 그리고 책(3권째)을 보며 몸과 정신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달리고 싶었는데 달리기에는 가슴이 답답한게 아직 숨이 편치 않았다. 격리해제=완치는 아니라니 차도를 지켜봐야지. 기침이 한 달 이상 가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후유증이 길지 않길, 심폐에 큰 영향이 없길 바랄 뿐이다.

일주일새 세상은 봄이 되었다. 망아지가 되는 대신에 덩달아 일주일이나 어리둥절 격리해야 했던 ㅠㅠ 두유와 밀린 산책을 했다. 북악산 계곡 사이를 메우고 있던 얼음은 녹아 흐르고 있고 나뭇가지 끝에는 귀여운 망울이 번졌다. 봄기운은 산책길 풍경을 온화하게 바꾸고 있었다. 생(?) 공기를 맡고 싶어 인적 없는 곳에서 마스크도 슬쩍 내리고 폐 한가득 불어넣었다. 개운했다. 자유의 공기란.! 오늘의 대기질은 새빨간 미세먼지옥이라는 걸.. 집에 들어와서야 알았지만..

어느새 3월도 25일이 지났다. 이제 또 일주일이 지나면 4월. 모처럼 각오를 다지며 시작했던 내 2022년 3월이 이렇게 코로나 범벅으로 흘러가나 싶어 조바심도 들지만 뭐 어쩌겠나. 봄의 끝자락을 누리며 채워나가면 될 일이다. 어쨌거나 목적어는 건강이니까. 또 차근차근 달려봐야지.


*03-26-토

바로 어제 무리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고선 오늘 달렸다.

자꾸만 처지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어서 몸이라도 움직여야겠다 싶었다.

근 2주 만에 들른 운동장에도 봄이 와 있었다. 버석거리던 고목에 살뜰히 피어있는 샛노란 꽃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다리를 풀고 챙겨간 보리차 한 모금 마시고 출발.

뭐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찼다. 기록을 보니 겨우 2분 남짓 지나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아직은 무리인가 싶어서 호흡에 신경쓰며 뛰다 물 마시다 걷다 하며 느슨하게 돌았다. 조금씩 리듬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곧 1km가 지났다는 음성이 들렸다.

런데이 음악을 끄고 플레이리스트에서 몇 곡을 골라 나 혼자니까 볼륨을 끝까지 올리고 달렸다. 간밤 내린 비 덕에 맑았는데 금세 촉촉해졌다. 그대로 달려 딱 20분을 넘겼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고 생각보다 개운치도 않았다.

지난 새벽, 방준석 음감님의 비보를 들었다. 오랜 병환인지라 올 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고는 해도 도저히 쉬울 수는 없는 일이다. 격리해제 다음 날인지라 끝까지 고민하다 조의금을 대신해 보낸 게 이렇게 뒤늦게 죄송하다.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는 감독님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였다. 실은 최근까지 우리 프로젝트 작업 중이셨는데. 소식을 듣고 비통하면서도 스텝들과 스케줄을 떠올렸다.. 나도 참.. 죄스럽고 황망하고 안타깝고 아쉽고.. 답을 구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만 오간다.

달리기를 마치고 운동장과 꽃 사진을 찍어 부모님께 보냈다. 산수유꽃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빠가 향기를 맡아보라며 생강꽃이란다. 코를 대니 정말 알싸한 생강 향이 돌았다. 이렇게 세상엔 아직도 새로운 것들이 잔뜩이다.

모두들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해서 모르는 것들은 배워가고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누리면서. 이렇게 꽃향기도 맡고 안부도 나누고 제철 음식도 챙겨 먹으면서 기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부터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내 카테고리 안에서 사랑해야겠다.


*03-29-화

오늘처럼 대기질이 좋은 날은 달리지 않으면 괜히 손해 보는 것 같다.

퇴근하자마자 호닥 달리러 나왔는데 불빛 하나 없는 밤의 운동장은 너무나 어두웠다. 기왕 몸도 풀고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하며 막 달리려던 차에 어디서 자꾸 부스럭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고등학생 때 인근 대공원에서 늑대 한 마리가 철망을 뚫고 탈출해서 동네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새벽에 홀로 운동장을 조깅하던 아주머니가 돌연 불빛 두개가 반짝여 다가갔더니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늑대의 안광이었더라.. 같은 이야기는 이럴 때 꼭 생각난다. 여하튼 오늘 운동장 달리기는 포기.

내려오던 길에 무심코 하늘을 봤는데 깜깜한 덕에 도시 빛에 가려졌던 별들이 하나둘 보였다.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워 그대로 센터에 들러 아쉬운 대로 트레드밀에서 달렸다. 트레드밀은 역시 다리가 부자연스러워서 뛰는 맛(?)이 영 취향이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은 동네에서 자라서인지 늘 숲에 대한 갈망이 있는 편인데 이렇게 바깥공기 마시며 달릴 공간이 마땅치 않을 때가 더 그렇다. 마침 올해 안에 이사 갈 예정이라 자연 안에서 산책하기 좋고 가격도 합리적인 곳.. 잘 물색해봐야지.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봄비와 꽃샘추위(봄의 날씨는 이름마저 귀엽)가 함께하는 이번 주는 나도 일어나자마자 크게 기지개 펴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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