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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Jeon Nov 19. 2021

Pasadena는 LA 부자동네인가요?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아빠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집 명절은 모두 큰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명절에 식사를 할 때면 큰 식탁과 작은 식탁 두 개가 부엌에서 거실로 날아왔다.  딸인 나는 작은 엄마들과 함께 작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형제들, 삼촌과 함께 큰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큰 어머니도 그들과 식사를 했다.


한 번은 셋째 작은 엄마가 이만한 갈비를 젓가락으로 집어다가 남동생 밥그릇에 넣어준 적이 있었다.  친가는 남자가 귀했다.  큰 아버지네에 삼촌이 있었지만 둘째에서 다섯째 아버지 댁까지 딸뿐이었다. 막내인 우리 가족에서 세 번째 아기가 귀하디 귀한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작은 엄마는 유독 내 남동생을 좋아하고 아꼈다.  딸이라서 갈비를 밥그릇에 넣어주지 않아 슬펐냐고? 사소한 거지만 억울했다.  삼촌과 남동생만 돌림자로 '용'이라는 한자를 이름에 넣었다.  그 외 많은 딸들의 이름은 규칙 없이 마음대로 지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오래된 기조는 볼 일없는 우리 친척들 식탁에도 구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막내인 우리 아버지와 결혼해서 우리 엄마는 막내며느리가 되었다.  내가 다 자라서도 엄마는 친척 엄마들을 흉을 봤다.  임신해서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불편해도 힘든 일은 막내며느리인 엄마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가부장제를 체득했고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넷째 형제 중에 맏이인 나는 부당한 것은 절대 손에 쥐지 않는 제멋대로인 막내처럼 자라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향하는 책임과 옛 역할을 부정했다.  동생들은 맏언니가 설거지를 하면 깔끔하지 않다고 혀를 내둘렀다.  본가에 살면서 직접 요리를 한 것이 열 손가락에 뽑는다.  어렸을 때부터 핑크색을 싫어했다. 사회가 여성스럽다고 정해놓은 인식에서 나를 떼어놓기를 좋아했다.


사실 요리란 건 내가 해 먹을 음식을 직접 한다는 점에서 자립심과 숭고함을 가졌다.  친구, 가족, 애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준다는 건 많은 노력이 들어간 사랑이었다.  요리가 노동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요리는 큰 힐링이자 일상의 결과물이 되어준다.


이를 모르는 나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켰다. 집에 부엌은 있지만 없는 것과 같았다.  서울에 이어서 LA Pasadena 집에 와서도 애인에게 밥을 끊임없이 얻어먹었다.  하루는 애인이 크게 화를 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는 사랑을 너무 많이 주고 전혀 받지를 못해 더 이상 마음에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제야 엄마가 해준 밥들은 노동이기도 했지만 딸에게 정성껏 내놓아주신 사랑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받기만 해온 인생을 청산하고 사랑을 주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첫 연습은 맛있는 아침을 애인에게 차려주기였다.


아침에 커피를 내릴 때 기분이 좋다.  커피 머신이 아닌 수동형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내린다. 직접 손으로 커피콩을 돌리고 기구에 상체 전체에 힘을 줘서 내려야 컵 3분의 1 정도 양의 커피가 나온다.


빵을 잘라 오븐에 넣고 아보카도와 과일을 준비한다. 아침식사 준비는 리추얼이다. 음식을 남에게 받아먹을 때는 몰랐던 요리의 즐거움.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채우는 만족감. 더불어 요리는 자주 애인에게 줄 수 있는 꾸준한 사랑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부엌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Vagina 떨어지지 않았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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