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너무 좁아
아이들과 외출을 했다. 달라진 바람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계절이 바뀌려는구나 생각하려는데 그늘을 벗어나 햇빛으로 몸을 옮기니 여전히 남아 있는 여름의 흔적이 몸에 닿는다. 그 극명한 온도차가 신기해 오른발을 그늘에 걸치고 왼발을 햇살이 닿은 땅에 걸치고서는 몸을 왔다 갔다 흔들어본다. 시원했다가 더웠다가, 또다시 시원했다가 더웠다가.
냉장고 문에 엽서 한 장이 붙어 있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파리에서 산 엽서다. 사람들이 파리가 좋다는 말을 할 때면 뭐가 특별할까 싶었는데, 가 보니 정말 특별하게 좋았다. 그때의 파리가 좋아 몇 개월 뒤, 남편의 휴가 일정에 맞춰 다시 한번 그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아이가 없었기에 둘이 홀연히, 가뿐하게, 정처 없이 그저 둘만을 위해 다녀올 수 있었던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 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어딜 가든 당신 곁에 머물 것이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파리를 추억했던 헤밍웨이의 말이 정말 딱 맞았다. 그때의 여행이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육아로 힘들어진 일상에 축제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육아로 힘들 때면, 냉장고 문에 붙여진 그 엽서 한 장을 물끄럼이 바라본다. '그때 정말 좋았는데.' 그러면 아주 잠깐은 그곳의 아우라가 현실의 나를 휘감으니 마음이 어느새 두근두근, 축제를 즐긴다.
현관문 쪽 서랍장에 미술도구들을 모아 둔 곳이 있다. 어느 날, 첫째 아이가 그곳을 뒤적뒤적하더니 박스 하나를 꺼내 들고 나왔다. 20년 전, 과제를 하기 위해 구입했던 마커 컬러펜 세트였다. 그 순간 20년 전이 마치 엊그제 인양 그때 이 펜을 어디서 샀고, 이걸로 어떤 과제를 했고, 떨면서 발표를 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돋았다.
<우리 집은 너무 좁아>
대가족이 한 집에 시끌벅적 지내다 보니 잠 한번 편하게 자기 어려운 남자가 랍비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랍비의 조언은 키우는 암탉 같은 동물들이 있다면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인데 좁은 집이 불편해 조언을 구했는데 더 좁게 만드는 랍비의 말을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따르는 남자. 그 이후에 더 힘들어졌다며 찾아오는 남자에게 랍비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을 하나씩 집으로 더 데리고 들어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 이런 엉망이 따로 없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어 화가 난 남자에게 랍비는 이제 그동안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던 동물들을 모두 원래대로 내 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랍비의 말을 따른 그 남자는 식구들과 오랜만에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집도 그대로, 식구들의 수도 그대로, 어쩌면 그 사이 더 자랐을지도 모르는 아이들 덕에 더 좁아졌을 그 집에서 편안함을 찾은 남자와 가족들을 보며 생각한다. 육아 속에서 엽서 하나로 축제의 기분을 느끼고, 묵혀진 미술 재료 하나를 보며 오래전 그날로 돌아가듯, 주어진 내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생각의 지점만 찾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햇빛과 그늘 사이에서 어디로 몸을 옮길지 내가 정하 듯, 일상에서도 나의 선택으로 인해 조금 괜찮은 하루를 만들 선택권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이들과 늦은 저녁,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즐기던 때였다. 뛰어노는 아이들이 이내 덥다고 투덜댄다. 물을 마시기 위해 마스크를 잠깐 벗었는데도 아이들은 덥다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휘젓는다.
"엄마가 시원하게 해 줄까?"
"......"
"마스크를 다시 써 볼래?'
덥다는데 마스크를 다시 쓰라고 하니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아 울상을 짓다 이내 엄마의 속내를 알아차린다.
"엄마, 지금 <우리 집은 너무 좁아> 따라 하려는 거죠?"
금세 들킨 그 마음을 아이에게 해 보겠냐 하니 아이가 마스크를 다시 쓰고 그 더위를 잠시 견딘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고는 말한다.
"진짜네."
나의 일상을 괜찮게 할 생각의 지점을 찾아본다.
생의 마지막 순간.
아이러니하게 나의 지금을 괜찮게 할 생각의 지점은 생의 마지막 순간이다. 누구나 겪게 될 그 순간을 수시로 떠올리는 습관이 언제부터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생각할수록 무서움보다는 감사함이 채워진다. 지금 글을 쓰는 동안 톡톡 두드려지는 손가락 터치도, 팔꿈치를 대고 있는 딱딱한 테이블도 그리운 감각이 될 것 같아 소중해진다. 아이들의 칭얼거림, 보챔, 투정의 순간들조차도 그리워질 순간으로 바뀌니 지금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품고 싶어 진다. 살아있으니 힘들고, 살아있으니 버겁다 생각하니 불편한 상황에서 '그래서 어떻게?'로 마음이 기운다. 시원한 그늘과 뜨거운 햇살, 서늘함과 따뜻함 사이에서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있는 그대로 지금을 품어보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감사하다 느끼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