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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Nov 09. 2021

‘나’라는 사람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햇볕 쨍쨍한 날의 기적, SUN>

한 동안 연이어 기분이 좋았을 때가 있었다.


창 문 밖 살랑이는 나뭇잎이 예뻐 감탄이 나오고, 손에 닿는 촉감 하나하나에 감사함이 느껴지니 풍선에 바람이 채워지는 느낌처럼 마음이 부풀 때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일상의 패턴이 하나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한 동안 긴장을 좀 했던 탓인지 새벽 기상부터가 어려워졌다. 새벽 기상을 하지 못했다는 건, 잠도 잠이지만 하루 중 내 시간을 갖는 일이 줄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즈음 첫째 아이가 발이 아프다 하여 병원을 알아보고 진료를 받는 일로 조금 더 분주해졌다. 병원 일정이 끝나니 첫째 아이가 목이 아프다고 했다. 감기였다. 며칠 뒤, 둘째 아이에게서도 첫째 아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증상은 가볍지만 기관에 보내지 않기로 하고 아이들의 회복을 신경 썼다. 일주일이면 되려나 싶었는데 남편마저 아이들에게 옮았는지 제 기운을 찾지 못하니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연이어 나타나는 불편한 일상을 잠깐 멈추고 숨 고르기를 했다. 깊은 숨을 몇 번 크게 내쉬다 보니 얼마 전 감사함이 충만해 단단한 에너지 넘치던 시기가 이렇게 한 순간에 말랑말랑 해진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문득 작년 연말 첫째 아이와 그려 본 ‘인생 곡선’이 떠올랐다. 한 해의 이벤트들을 떠올리며 그려 본 인생 곡선. 가운데 0을 기준으로 괜찮은 기분의 정도를 (+)(-)의 정도로 점을 찍어 본 뒤, 서로 연결해 본 것이었다. 아이와 나의 인생 곡선 굴곡이 폭은 달랐지만 닮아있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지금은 이런 때구나. 이렇게 내려가는 시기구나.’


인생곡선의 패턴을 떠올리니 지금 이 불편한 것들이 나의 인생곡선의 고점을 찍은 지점부터 점점 내려오고 있는 어디쯤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내려갈 수도 있고,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반동으로 다시 올라 올 수도 있고. 삶의 패턴을 이해하고 나니 나의 지금이 이런 날도 있는거라며 위안이 되어 주었다.


며칠 째 의욕도, 식욕도 없어 먹을 것이 부실했는데, 날 위해 입맛 돋우는 무언가를 먹어보기로 했다. 먹는 걸로 지금의 불편함이 회복될 거란 기대가 크진 않았지만 하찮더라도 해 보고, 해봐서 아니면 말고의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얼마 전 남편이 만들어 준 레몬 맥주가 생각났다. 레몬즙을 맥주에 넣는 건데 남편 말로는 배율이 중요하다고 했다. 주는 것을 마시는 것만 잘했던지라 배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먹어보며 맞출 생각으로 레몬 하나를 꺼냈다.


대낮에 맥주. 그리고 레몬.

냉동실에 미리 넣어 둔 탓에 살얼음이 살짝 있는 맥주와 시큼한 레몬맛 덕분에 맥주 광고 속 ‘캬’ 소리가 절로 나오니 조금 흥이 났다. 맥주만 먹기 아까워 냉동실 떡볶이 키트를 꺼내어 금세 보글보글 끓였다. 완성된 떡볶이와 맥주를 보란 듯이 맛있게 먹었다. 매운맛이 나를 잡고 ‘이제 일어나 보라며’ 일으켜 세우고, 그런 나에게 레몬이 생기를 넣어주었다. 내가 먹을 것 하나로 이렇게 기분이 달라질 만큼 단순한 사람이었던 건가 싶어 웃음이 나려는데 이 사소함으로도 기분이 괜찮아질 만큼 요즘 어려웠다 생각하니 음식의 도움을 받고서라도 털고 일어나 보기로 했다.


숨겨진 웃음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잔뜩 색으로 힘 준 가을을 함께 즐길 수 있고, 그동안 잠이 부족했던 첫째 아이가 회복할 시기를 갖고, 두 아이들이 함께 노니 엄마만 찾지 않아 맥주를 마실 여유가 되니 하나씩 찾아지는 웃음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곡선이 다시 올라가기 위해 슬쩍 방향을 튼 기분. 괜찮아지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이글이글한 날, 보기만 해도 뜨거운 날, 나 같으면 당연하게 집에 있어야 하는 그런 날, 할아버지는 오히려 ‘모험을 떠나기 좋은 날’이라고 한다. 그 말에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하는 아이와 할아버지. 모험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 모험을 하는 동안의 역할 분담도 한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을 걷기 시작한 아이와 할아버지.


걷다가 잠깐 쉰다.

쉬면서 길을 다시 찾고, 다시 찾은 길을 또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다시 잠깐 쉬고.

쉬면서 다시 길을 찾고. 그리고 또다시 걷고.

예상치 못한 ‘해적’을 만나기도 하고, '해적'을 만난 일이 추억이 되기도 하는 모험.


아이와 할아버지의 모험을 살펴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되는 것.

쉬다 가다를 반복하는 것.

목적지가 바뀌기도 하는 것.

예상치 못한 일을 겪기도 하는 것.

그 예상치 못한 일이 선물 같은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


이런 삶의 모습을 살피고 나니, 지금의 나는 햇볕 쨍쨍한 날 걷고 또 걷는 아이와 할아버지처럼, ‘나’라는 사람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본다. 잠시 멈추고 나의 여행을 살폈다. 잠시 모험을 쉬고 있는 중인지, 한참 거센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인지, 모험의 방향을 새롭게 고민하는 중 인지, 해적을 만난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고 있는지, 아니면 해적을 만난 일이 오히려 선물이 되어 즐기고 있는 중인지.


모험을 하던 중 잠깐 쉬는 중이었고, 쉬면서 너무 고단한 여행이라며 푸념했고, 뭘 좀 먹어야겠다 싶어 레몬 맥주를 마셨고, 조금씩 에너지를 채우며 지난 모험을 돌아봤고, 지난 모험 속 숨겨진 웃음을 찾으려는 모습이 정말 여행을 하는 과정 같았다.  ‘나’라는 사람의 여행.

 

지난 여행 가방을 풀고 앞으로의 '나'를 여행하기 위해 여행가방을 다시 채워보기로 했다. 나의 '앞으로'를 '여행'이라 말하니 조금 들뜬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나’를 여행하기 위한 가방, 어떤 물건들을 채우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지금의 내가 보인다. 선크림, 모자, 선글라스를 챙기며 기미를 신경 쓸 나이가 된 나. 예쁘고 불편한 신발 대신 내 발에 편한 신발을 챙기는 걸 보니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나에게 편한 것을 생각하는 나. 지난 모험을 위해 챙겨 넣었던 만화책들 대신 오래 품고 싶은 그림책도 챙겼다. 간단하게 그림 그릴 도구들은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싶은 걸 보니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이 언젠가는 제대로 마주해야 할 남은 과제 같았다.


여행가방이 새롭게 준비되고 레몬 맥주로 에너지도 채웠으니 이제는 다음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손을 털고 일어나야겠다.


맥주 탁인가, 그림책 탓인가, 숨겨진 웃음을 찾은 탓인가. 내려가던 인생곡선이 방향을 틀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에 다시 눈이 떠지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어디까지 올라가려나. 어느 지점에서 또다시 내려오려나. 물을 가지고 놀며 수영을 하는 것처럼 나를 즐기는 방법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듯 마음이 다시 부푼다. 이번에는 어떤 여행이 될까. 이번에는 또 어떤 ‘해적’을 만나게 될까. 기대를 품고 출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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