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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선생 Dec 14. 2023

사마르칸트에서 서울까지

문학동인 <가향> 2023년 6월 회지 글

사마르칸트에서 서울까지


                                            이석례


 8번 출구로 올라오는 후스가 낯설다. 그 뒤를, 처음 보는 여자 두 명이 따라왔다. 후스는 10년 전 사마르칸트 국립외대 한국어학과 학생이었고 그 때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이다. 우리는 반갑게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근처에 있는 대형 쇼핑몰 건물로 들어가 식당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인사를 했다. 후스는 한국에 유학을 와서 한국어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우즈벡문학과 한국문학 비교 연구’ 주제로 박사과정 졸업단계에 있다. 그러다보니 그는 벌써 한국생활 9년째다. 

 그동안 나도 페루에 나가 있었고 또 코로나 사태로 제대로 만나지를 못했다. 전화와 SNS로만 연락을 했다. 후스는 몇 년 전 우즈벡에 가서 결혼을 했다. 부인은 전형적인 우즈벡 여자였지만 스카프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다행이 벌써 아들 둘을 낳았고 세 살, 8개월 된 아들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남편인 후스에게 왔다. 다른 한 여자는 후스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눈동자가  에메랄드 색으로 빛이 났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을 때까지 가장 사랑했던, 우즈벡의 남쪽 지방 테르미즈에 살았던 ‘록산나’라는 여자의 눈빛과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마르칸트에 있을 때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후스 부모가 학교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노인이 아들을 한국에 보내달라고 간절히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후스가 시골에 사는 외삼촌댁으로 나를 초대해서 극진한 대접을 해 주기도 했다. 타국생활의 어려움을 나도 겪어봤기 때문에 오늘은 한국에서 내가 그들에게 밥 한 끼라도 사 주고 싶어서 만났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기 때문에 식당에서 주문할 메뉴가 별로 없었다. 후스가 나서서 값이 가장 싼 설렁탕과 소불고기비빔밥을 주문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후스에게 우즈벡 제자들의 근황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대학생이었던 제자들이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어를 전공한 학생들의 꿈은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유학생으로 노동자로 한국에 왔다갔거나 지금 한국에 있다. 그 중  후스와 제일 친했던 바르가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와서 일하다가 결혼도 못했고 우즈벡에 돌아가기 싫어서 불법체류자가 된 안부가 궁금했다. 다행이 바르가 특별조치 기간에 자수형식으로 벌금 안 내고 우즈벡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에 안도가 됐다. 그들의 우즈벡 상황을 알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쓰이고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둘만이 대화를 이어가다보니 좀 미안하기도 해서 가끔 후스의 통역으로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의 오지랖과 걱정에 어떻게 돈을 마련해서 비행기표를 샀는가 물어봤다. 그들은, 불법이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공장에서 단기로 일하고 있단다.

 “선생님, 저는 이제 편의점 알바를 그만해야겠어요. 밤에 잠을 못자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아요.” 

후스가 배를 만지작거리며 심각하게 말했다.

 “그래, 너무 오랫동안 고생했다. 9년 동안 밤낮없이 일하고 공부하고 참 대단하다.”

마음이 짠했다. 아무쪼록 다치지 말고 일한 값을 떼이지 말고 한국을 구경하고 잘 돌아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국경을 두 번 넘어야 바다를 볼 수 있는 중앙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우즈벡에 살다보니 그들은 바다를 보고 싶어 한다. 후스도 부인과 동생에게 한국의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바다여행에 끼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리를 옮겨 커피숍에 갔다. 마침 한 여학생이 온다고 했다. 커피를 마실 때 마스크를 한 날씬한 여자가 뛰어왔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려 내게 안겼지만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잠시 후 마스크를 벗은 그녀를 알아보고 놀랐다. 그리고 가슴이 뜨끔했다. 하필이면 후나라니!. 사마르칸트에서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3학년 베반이었던 후나가 기말시험이 끝나고 성적처리가 됐을 때 나를 찾아와 두 손을 모아 빌며 애원을 했다. 자기 점수가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나왔다고 점수를 올려달라는 것이다. 그들의 사정은 알지만 한 번 준 점수를 정정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이 가고 또 귀찮아서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녀가 한 시간 가까이 교무실을 안 나가고 눈물까지 보였지만 나는 끝내 수정해 주지 않았다. ‘점수가 뭐라고 그 알량한 선생이란 위치로’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후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지만 지금 혼자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석사과정으로 와 있다고 했다. 남편은? 아이는? 물어보면 곤란하다. 서로가 무언으로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녀에게 지난 이야기를 했다. 그 때 ‘선생님이 미안했다. 성적 올려주지 않아서......,’ 후나는 웃었다. 나는 깡마른 제자의 어깨를 가슴 깊이 안아줬다.   2023.05.20.


*2013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국립외대 한국어학과 - 한국에 있는 ** 대학교 학생들이 우즈벡 방문 



 

*한국에 살고 있는 우즈벡 제자의 초대로 제자가 살고 있는 집 방문했을 때 제자가 만든 우즈벡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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