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살 차이 나는 오빠가 있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는데,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편이라 인기가 꽤 많았다. 오빠 덕분에 학교생활은 행복했다. 언니들이 오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동생인 나에게 과자를 안겨주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창 식욕이 왕성했던 나는 군것질의 유혹에 곧잘 넘어갔곤 했다. 그런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연애라는 걸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빠의 첫사랑, 첫 번째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사람일까. 그녀가 처음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난 궁금한 마음에 버선발로 달려 나가 마중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생인 오빠와 동갑인 그녀는 교복을 입고 양손에 간식거리를 한가득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와 마주한 순간, 예쁜 얼굴보다 과자봉지가 더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살짝 눈인사만 하고는 오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빠는 같이 공부할 거니까 방해하지 말라며 문을 닫았다. 너무나도 궁금했던 오빠의 첫사랑 그녀를 나는 문틈으로 훔쳐봤다. 혹시 과자를 나눠주러 나오기라도 한다면 무슨 말을 걸어볼까, 내심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조용하더니 공부가 끝났는지 방문이 열렸고 그녀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해 동생인 나를 본 느낌이 어땠는지 너무 궁금했다.
“오빠, 오빠, 그 언니가 나보고 뭐래?”
“네 동생 무섭다. 그러던데...”
헛, 실망이었다. 난 그녀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내가 무섭다고? 나를 오해한 그녀에게 마음이 상하자, 괜히 오빠한테도 서운했다. '에잇, 헤어졌으면 좋겠다.' 나의 저주가 통했던 걸까. 오빠의 첫사랑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이듬해 오빠는 대학생이 되었다. 한 번은 고등학생인 나를 두고 부모님이 시골 할머니 댁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나가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양손 무겁게 포장한 음식을 들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커다란 눈, 한눈에 봐도 엄청 예쁜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아, 안녕, 난 오빠 여자 친구인데 부모님이 시골 가셨다고 들어서요. 동생이 혼자서 어떻게 밥을 챙겨 먹고 있나 걱정돼서 와봤어요.”
오빠의 두 번째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용돈 하라며 내 손에 쥐어줬다. 생각지 못한 일이라 좀 당황스러웠지만 얼떨결에 받아 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시누이의 눈으로 그녀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얼굴도 예쁜데 착한 것 같아. 그래, 바로 이 언니다!’
나는 그 날 그녀를 나의 올케언니로 찜했다. 맛있는 음식과 용돈에 넘어간 건 절대 아니다. 그저 가족을 배려하는 따뜻함이 느껴졌고, 진짜 우리 가족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오빠는 그녀와 7년을 만났고 결혼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심하게 다퉜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별하기로 했다. ‘오래된 연인이 헤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더니 그게 오빠 얘기였구나.’ 누구라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정말 이대로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이틀 후면 그녀의 생일인데 이별을 선물하는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난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졸랐다. 작고 예쁜 목걸이를 하나 골라 선물포장을 하고 생일 축하엽서도 준비했다. 그리고 꽤 커다란 수박 한 통을 가슴에 안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오빠와 끝이 났다고 해도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 가다 보니 어느새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나를 보고 놀란 그녀가 뛰어나왔다. 수박과 선물을 건네면서 "언니, 생일 축하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향해 500미터쯤 되는 골목길을 걸으며 난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대학 입학, 첫 직장에 취업하기까지 나와 그녀가 함께 한 소중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집에 도착하니 오빠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었고 오빠는 못 이긴 척 받은 것이었다.
어느덧 오빠와 그녀가 부부가 된 지도 18년이 다 되어간다. 난 가끔 그날 내가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녀가 내 올케언니가 되는 일은 없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내가 그녀를 올케언니로 찜했던 그 날처럼, 그녀는 변함없이 우리 가족을 끔찍이도 챙긴다. 나 또한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면 항상 작은 선물과 카드 한 장을 준비한다.
“내 올케언니로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