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내가 글을 쓰는 이유 (3/3)
나는 높은 성과를 이뤄내고 싶었다. 나보다 앞선 기존사원들을 뛰어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쳤다. 역량을 넘어서는 도전을 시도했고, 결국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얻었다. 그걸 바라보며 뒤늦게 깨달은 점이 몇 가지 있다.
학생과 사회인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대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의 지원을 받아 창업을 체험하는 기회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이었던 나는 배움을 추구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대수롭지 않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창업이 잘 됐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깨달은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인이 된 내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아니었다. 사회인은 무엇을 배웠는지 보다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지가 더 중요했다. 성과 혹은 실적 같은 것들 말이다. 결과만을 평가받으며 그에 따른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는 것이 사회인이었다. 깔끔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생의 신분으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도전하는 것보다 훨씬 냉혹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사회인이 된 나는 아직도 학생 같은 사고방식에 갇혀있었고, 학생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한 ‘어리숙함’이 도전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었고 막상 실패했을 때, 책임이라는 무서움이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나를 구속했다.
학생과 사회인은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좀 더 신중하게 도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지금부터라도 가슴속에 새겨둔다. 나의 도전과 얽힌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패했을 때의 피해는 커지고, 뒤따르는 책임은 감당 못 할 수준으로 바뀐다는 것을. 따라서 무언가를 시도할 때는, 신중함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실패할 때도 따져보는 신중한 태도 말이다. 최악은 도전하기 전의 상태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했을 때는, 도전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갈 것임을 명심하자.
예전에는 종종 후배들이나 친구들의 실패를 가볍게 위로하곤 했다. 나와 비교하면서, ‘너는 별것도 아니니까 힘내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입장이 바뀌어보니, 그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나를 위로해준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를 장황히 풀어놓았다. 그리곤 자신들과 비교하며 별것도 아니라고 쉽게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하는 말들이 가슴에 와 닿기는커녕 잔소리처럼 들렸다.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꼰대 유형부터, “그건 별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며 내 아픔을 쉽게 판단하고, “더 힘든 상황인 사람들도 많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스타일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경험한 셈 치고 툴툴 털어버려”라고 조언까지 잊지 않는다.
그중에서 남과 비교하는 스타일이 가장 짜증이 났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힘들어하면 안 되는 건가. 다른 맥락이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에서 일하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회사의 규모만을 봤을 때는 대기업 종사자가 수준 높은 업무를 담당할 것이기 때문에 더 힘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업무를 하는 중소기업 종사자는 덜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힘들다’의 기준이 ‘회사규모’가 된다면, 중소기업 종사자는 불평불만을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대기업 종사자는 투정부려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니, 대기업 종사자는 전체의 프로세스 중에서 한 개의 업무만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중소기업 종사자는 모든 걸 혼자 쳐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더 고된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그러니 타인의 아픔을 무언가와 비교하며 쉽게 가늠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이상,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더 힘들 것이다, 덜 힘들 것이다.'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자. 누군가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가볍게 치부하지 말자고. 특히, 자신의 경험 혹은 제삼자와 비교하며 “별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조심하자. 아픔의 기준은 그 사람이 당면한 상황 그 자체만을, 그리고 그 도전이 그 사람의 삶에서 얼마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가 된다. 아픔의 크기는 비교하는 게 아니다.
정보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시행착오를 쌓을 수밖에 없었다. 내 바로 윗 선배들도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들 위의 선배가 말해주는 것만이 정보였고 기준이었다. 그 위에 사람들은 정보도 없이 맨몸으로 부딪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특히 대면이 필수였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과외, 상담, 컨설팅/멘토링 등도 비대면과 실시간이 가능해졌다. 강습은 무조건 스키장에서 강사와 얼굴을 마주하고 배워야 한다는 인식도, 유튜브의 등장으로 서서히 깨지고 있다. 눈을 밟지 않고서도 집에서 편히 누워 스키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브런치에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작가님이 궁금해요.
삶을 살아감에 있어, 누군가 나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는 가이드 역할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런 욕구를 절실하게 갈망하는 와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지나온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글을 쓰려 합니다. 글이지만, 글로도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애로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브런치 작가를 지원할 때 썼던 글이다.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고 활성화될수록 누군가의 도전이 실패할 가능성도 낮아지지 않을까 싶다. 나의 글이어도 좋고 브런치의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을 읽는 것도 좋다. 유튜브로 정보를 얻어도 좋고, 아는 지인에게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다. 되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시행착오를 줄일 뿐만 아니라 실패의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