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책임의 무게 (2/3)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은 매출과 관련이 깊다. 매장을 운영하며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로드 손님과 뜨내기손님 등 신규고객들을 유인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식과, 단골손님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하여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높은 회전율을 이룰 수 있다면 폭발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고, 후자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단골손님으로 인해 고정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두 가지 방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규고객의 시선에서 볼 때, 어떤 매장을 방문할지는 첫 느낌이 관건이다. 매장의 디자인, 이미지, 그리고 매장이 어느 곳에 있는지 등이 매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첫 느낌’을 보조하는 역할이 블로그, SNS 등에서 볼 수 있는 '방문 후기' 즉, 입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잘 관리하게 되면, 신규고객을 폭발적으로 유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규고객을 단골손님으로도 만들 수 있다. 단골손님은 매장의 고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객이다. 특히 몇몇의 특별한 단골손님은 매장을 성장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들은 스스로 입소문을 낼 뿐만 아니라, 아는 지인들에게 매장을 소개해주거나 직접 지인들을 데리고 온다. 그들은 그러한 과정들을 뿌듯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매장이 성장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따라서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규고객 또는 단골손님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방식도 확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내가 매장을 운영하기 전과 후의 매출 변화가 없었다.
내가 렌탈샵을 맡겠다고 외칠 수 있었던 자신감은, 매니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와 ‘사장’의 역할은 엄연히 달랐다. 매니저는 매장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사장이 손님을 유인해오면 그 손님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 말은, 매니저는 손님을 유인하는 역할도 아니고 그런 역량과 힘도 없음을 의미한다.
내가 매니저로 일했었을 때도, 손님들을 직접 유인해본 경험이 없었었다. 사장님을 통해 방문하는 고객을 다뤘을 뿐. 손님을 유인하는 역할은 사장님이 대신했다. 이를 간과했던 것이 나의 큰 실수였다. 매장만 잘 관리하면, 손님들이 알아서 찾아오고 자연스레 높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참패의 또 다른 원인은 ‘관리 부재’였다. 강사로서 강습하다 보니, 매장을 비울 때가 많았다. 내가 강습을 나가게 되면, 직원 2명이 매장을 관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내가 강습을 하러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매장이 문을 닫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잇대가 비슷했다는 것도 문제였는데,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을 다루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모든 행동과 생각을 나와 같이 하려 했다. 직책으로 그 행동들을 저지하기에는, 나잇대가 비슷한 내 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뒤늦게 깨닫고 흐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너무 늦었었다. 그동안 해오던 것을 갑작스레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은 하던 걸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강압적으로 하거나, 좋은 말로 구슬리는 방법을 통해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치자. 처음에는 나의 뜻에 동의해서 함께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안 하던 걸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반발감이 생긴다. 자신은 변할 수 없다는 실망감과 함께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무엇하나 성과라고 자랑할 만한 것 없이 강습팀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팀장님은 실망감에 찬 눈빛이었고, 그 이후부터 나에게 중요한 업무를 잘 주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러게, 왜 고생을 사서 하냐. 그냥 하던 일이나 잘하지’라는 뜻이 담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내 입지는 도전하기 전보다 더 내려가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하니’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레저 일은 나와 적성이 맡지 않는 것 같으니,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까.
그렇다면, 집에 계신 부모님께는 어떻게 설명하지. 호언장담하고 나왔는데.
팀장님께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하면 뭐라고 말할까. 믿어는 주실까.
그때의 나를 괴롭혔던 또 다른 문제는 ‘책임’이었다. 실패에 따른 결과를 책임져야 했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주변 사람들 말이다. 이번 건은 어린 직원 2명과 매출이 저조한 렌탈샵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 하나 내가 책임질 수 없었다. 나조차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2명의 친구를 책임진다는 것은 무리였다.
돌이켜보면, 그 친구들에게 가장 미안했다. 매출에 타격을 준 것은 강습을 더 하거나 해서 보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물론 삶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친구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한 건 확실했다.
레저에 대한 환상과 꿈을 갖고 들어왔을 텐데, 그걸 내가 짓밟은 것이다. 혹여 나 때문에 그 친구들이 레저에 대한 꿈을 접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친구들은 도전할 생각도 없었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내 실패의 영향이 아무 관련 없던 그 친구들에게 번진 것이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면서, 나는 어떤 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것은 ‘도전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다음 시즌에 다시 한 번 맡으면 제대로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감이 온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되겠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는 괴리감에 찬 두려움이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 리스크를 극복하는 사람이 성공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글쎄, 나는 그 사람들이 실패를 극복했던 과정이 궁금하다.
그 사람들은 '실패로 인한 책임'이 크질 않았나? 책임질 게 별로 없었나?
아니면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도, 책임지지 않고 또 도전하는 건가?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잖아.
그렇게, 피해 본 사람들을 외면해 가면서 성공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아, 물론 책임질 건 다 책임지고 또 도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크기에 부딪히면 어떡하려나? 또, 당장 그 사람들을 구제해줄 수는 없지만, 실패를 딛고 성공해서 나중에 보답해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그 사람들이 나락으로 빠지면 어떡할 것인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끝인가?
나는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실패를 어떻게 수습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