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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디바비디부 Feb 07. 2024

왜 하필 캐나다였을까?

1년 살기는 정해진 답도, 방법도 아무것도 없다

* 이 글은 곧 전자책으로 출간될 예정인 '가족이 사랑한 시간, 캐나다 1년 살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책이 출간되고 난 뒤에는 부분적으로 내용이 수정/삭제될 수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수상 택시들이 미끄러지듯 물 위를 가른다. 좁은 항구를 벗어나 태평양 바다로 나아가는 수만 마리의 치어 떼의 몸부림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왜가리 한 마리가 몸부림치는 치어 떼를 노려보고 있다. 결국은 그중에 한 마리가 긴 주둥이에 낚였다. 왜가리가 머리를 치켜들어 주둥이를 하늘로 들어 올리자 이내 물고기의 모습이 사라진다. 그때 머리 위로 캐나다 구스 무리가 거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구스 무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 다운타운의 빌딩 숲 뒤쪽으로 거대한 설산이 희끄무레 보인다. 해변가에 앉은 사람들은 야생 토끼에게 당근을 던진다. 어린아이들은 코요테를 조심하라는 팻말이 보인다. 아이는 코요테의 크기를 물어보며 은근한 두려움을 느낀다. 대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곳, 바로 밴쿠버다.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유명한 Lee’s dounught을 사 들고 자리를 잡았다. 우리 가족은 몇 주 전에 밴쿠버에 도착했다. 모든 절차는 빨랐다. 외국에서 한번 살아보자고 결정한 날로부터 2개월 정도가 걸렸다. 누군가는 1년 살기를 위해서 2, 3년을 준비한다고 한다. 무슨 자신감인지 우리는 겨우 2개월 만에 내 나라를 떠났다. 첫 시작은 떠나기 직전 해의 늦은 가을이었다. 단풍은 햇살과 함께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지난 계절의 비바람과 바삭한 태양의 목마름을 그대로 버틴 겸손하고 고결한 가지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나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냄새를 한껏 즐기며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외국에 가서 살아보면 어떨까?”

 갑작스러운 남편의 제안에 내가 어떤 반응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웃었을 수도 있고, ‘왜?’라는 질문을 놀란 표정으로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부터 우리는 곧장 진지하게 이 일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 스물한 살의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보냈다. 축복받은 날씨와 햇살, 그 아래에 부서지는 파도. 내 기억 속의 캘리포니아 햇살이라면 온 가족이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가 겹치면서 비자 문제가 수월하지 않았다. 미국은 워낙에 쉽게 비자를 내어주는 나라도 아니지만, 코로나 시기는 그 문제를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육아휴직 시점을 미리 생각하고, 비자부터 신청했다. 같은 형태의 비자를 신청한 사람이 1년 후에나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는 둥, 인터뷰를 보고도 몇 개월을 기다렸지만 결국 거절당해서 모든 게 무산되었다는 둥 온갖 부정적 후기가 쏟아져 나왔다. 딱히 얽매인 일이 없던 나에게는 가는 시기나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해외에서 살아보는 게 목적이라면 꼭 1년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미국의 경우는 무비자로 3개월 동안 체류가 가능하다. 영국과 캐나다 또한 6개월간 체류할 수 있다. 그 정도라면 아이를 데리고 장기간 머물면서 여행도 가능하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가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고 몇 개월간 여행만 다니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한창 또래들과 어울리며 사회성도 배우고, 규칙도 배워야 할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합법적으로 최대 1년 6개월 정도를 쓸 수 있는 법정 육아휴직 기간은 아이가 만 8세 이전에 가능하다. 언제 나올지 확실하지도 않은 미국 비자를 기다리기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약 석 달 정도는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간을 보냈다. 차라리 가지 말자며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렇게 계속 지역에 대해 논쟁만 하다가 끝나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캐나다였다. 남편은 대학시절에 캐나다의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지냈다. 남편의 기억 속 캐나다는 춥기만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런던은 눈이 많이 오기로 소문난 캐나다 동부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가난한 교환학생 시절을 보낸 남편에게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나에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캐나다는 밴쿠버가 전부였다. 


 분명 늦가을 언제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친구와 둘이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미국에서 캐나다 국경을 넘었을 때가. 그때 밴쿠버에서 지낸 3일 내내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아직 20대 청춘의 열정과 패기라면 우비를 입고 걷는 것쯤은 낭만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동양 여자애 둘은 비가 내리는 스탠리 파크를 걸으며 캐나다 횡단이라도 한 기분에 빠졌다. 작은 도시였지만 인상 깊었다.      

 전 세계에서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다운타운을 찾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 부부끼리만 이동했다면 선택지가 더 넓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된 우리는 결국 아이와 동행할 때 가장 이상적인 도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온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나가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비자가 지금보다는 수월하던 시절엔 미국이 인기 지역이었다.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유학하던 때 만해도 그런 식으로 자녀들과 함께 온 부모가 꽤 많았다. 그 당시에는 부모가 F1 비자를 받아 대학교나 어학원 등에서 수업을 듣고, 동반 자녀들은 무상으로 공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너무 많은 외국인들이 무상 교육을 받는 것을 깨달은 미국 정부는 그 문턱을 높였다. 하지만 캐나다는 아직 그 기회의 문이 열려있는 편이다. 미국보다 수월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고, 부모와 자녀 모두 학업이 가능하다. 또 다른 방법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학비를 내고, 입학 허가서를 받아 비자를 받는 방법도 있다. 공립학교의 학비는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간 2022년 기준으로 연간 약 1300만 원 정도였다. 사립학교는 가톨릭 사립학교부터 independent school이라고 불리는 private school 등 다양하다. 학비 또한 2000만 원 초반부터 3000만 원 후반까지 학교마다 각양각색이다. 밴쿠버에는 primary school부터 senior school까지 매우 다양한 범위의 사립학교가 존재한다. 공립학교도 두세 블록에 하나씩은 있을 정도로 지역구마다 촘촘하다. 학교를 선택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므로 내 입맛에 맞게 준비를 할 수 있는 장점이 많다. 위에 말했듯이 부모가 어학원이나 대학교에 어플라이를 하고, 학업을 해도 자녀는 무상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무상 교육은 공립학교에 한정된다. 두 가지 모두 온 가족이 함께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그렇게 캐나다에서도 조금 더 익숙하고, 온화한 날씨에 속한다는 밴쿠버로 해외 1년 살기 지역을 결정했다.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밴쿠버는 광역 밴쿠버라고 밴쿠버 주변의 신도시 개념의 작은 도시들을 모두 합쳐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광역 밴쿠버 안에서도 또다시 어느 지역에 거주할지를 정해야 한다. 18년 전에 밴쿠버로 여행을 갔을 때 만해도 밴쿠버가 밴쿠버지, 뭐 또 다른 밴쿠버가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 한국인들이 밴쿠버 여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랜빌 아일랜드와 스탠리 파크, 키칠라노 비치와 밴쿠버 다운타운이 있는 곳은 ‘밴쿠버’다. 밴쿠버에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너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웨스트 밴쿠버’와 ‘노스 밴쿠버’가 나온다. ‘노스 밴쿠버’에서 아래쪽으로 더 내려가면 ‘버나비’, ‘코퀴틀람’, ‘웨스트 민스트’ 등의 또 다른 신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밴쿠버 국제공항 근처에는 ‘리치먼드’가 있고,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써리’, ‘델타’라는 또 다른 도시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크고 작은 도시를 합쳐서 ‘광역 밴쿠버’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광역 밴쿠버’라는 것은 없다. 밴쿠버 옆의 써리, 버나비 등을 설명하자니 귀찮은 한국인 한 명이 만들어낸 말이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밴쿠버는 많이 들어봤어도 인근 지역의 도시들은 나에게도 생소했다. 그런데 그 생소한 도시들에 보통 한인타운이 형성되어 있고, 한국인들의 집단 거주지역도 많다. 밴쿠버는 모자이크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산다. 그래서 다른 국가나 도시보다 한인타운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한인타운이 형성된 지역들은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한국인도 많고, 한국 상점과 상품도 많다. 우리처럼 짧은 시간 잠깐 살아보는 개념이 아닌 이민자들의 경우는 아무래도 한인타운 주변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겨우 1년 남짓 살다가 오는 우리 가족의 경우는 이왕이면 한인타운을 벗어나 외국인들이 많은 지역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이것 또한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선택이다.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1년을 살아도 한국인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을 수 있다. 이처럼 1년 살기는 정해진 답도, 방법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 해 볼만한 것이다. 모든 것이 패키지여행을 가듯이 정해져 있다면 몸은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의 진짜 묘미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정해준 것을 따르는 삶은 이미 한국에서도 많이 해보지 않았는가.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살아보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해외 1년 살기다.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국에서처럼 살 생각을 하며 현지에 온다면 실망과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 가족은 치밀한 계획도, 구체적인 준비도 없었다. 우리가 평소 살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역을 정했다. 우리가 평소 좋아하던 취향을 최대한 반영했다. 예산이나 비자 문제 등에서 걸린다면 조금 우회해서 비슷한 것을 찾아갔다. 그럼에도 막상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것들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강한 존재다. 어디서든 결국은 살아가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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