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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Jan 28. 2024

제주도가 가르쳐 준 돈 쓰는 방법

나는 옷 사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직장인이 된 이후로 야밤에 쇼핑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끊을 수 없는 '길티 플레저'였다. 매일같이 하는 쇼핑이 나 자신을 관리하고 돋보이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쇼핑한 옷들 중에 아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 두어 번 입고 질려서 처박아 둔 옷, 질이 좋지 않아 금방 저렴한 티가 확 나는 옷들이 내 방 어딘가에 차곡차곡 몸속 지방처럼 쌓이고 있었다.


제주도에 오니 옷을 살 동력이 사라졌다. 여전히 야밤에 카드를 긁어대는 일은 짜릿했지만, '이거 사도 입을 일이 없잖아?'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면서 옷을 사는 빈도수가 줄었다. 제주도는 한 껏 꾸미고 어딘가를 갈 일이 없고, 꾸미고 나가면 뭔가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고, 혹은 그냥 길거리에 사람이 아예 없다. 그래서 점점 내가 과거에 즐겨 입던, 몸을 옥죄거나, 한쪽이 항상 파여 있거나 하는 등의 옷들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대신 편안하고, 질이 좋아 오래 입을 수 있고, 내 몸이나 스타일에 맞는 옷들이 좋아졌다.


"옷"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뀐 것도 있지만, 한정된 나의 재화를 다른 곳에 쓰는 것이 내게 더 가치 있음을 배웠다. 예를들어 나에게 이동의 자유를 선사할 교통수단들. 나는 서울 문물이 그리울 때면 비행기를 타야 했다. 비행기값에 돈을 쓰려면 쓸데없는 소비는 줄여야 했다. 무엇보다도 버티다가, 버티다가 차를 샀다.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로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는 상황에 열이 받아 며칠 만에 결정하고 차를 샀다. 어쩔 수 없이 사게 된 차지만, 이 차는 나를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함으로써 무례한 낯선 사람들을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 몇 분이라도 꾸물쩍대면 놓쳐 버리는 버스에 대한 스트레스 등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말엔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덕분에 따가운 제주도 햇살을 차창 너머로 받아내며 운전을 할 때면, '나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잖아?'라는 생각이 문득 솟아오른다.


얕은 소비는 순간의 도파민에 불과할 뿐 내 삶에 진정한 가치를 안겨다주진 못한다. 그러나 ‘진짜’ 소비는 나라는 사람의 근육이 되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무 살부터 서울에서 생활하며, 넘쳐나는 물건들, 항상 새롭고 좋은 것들,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특히 백화점에 갈 때면, 나 빼고 모두가 외제차를 몰고 숫자 0이 한없이 붙은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구매하는 것 같았고, 속으론 한껏 주눅 들면서 겉으론 의연한 척하는 삶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어딜 가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판단당하는 일은 도시생활자의 기본 의식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쏟아지는 인터넷 속 광고들은 이성이 마비된 야심한 시각의 나를 아주 손쉽게 자극할 수 있었다.


제주도는 수많은 외부자극을 덜어내고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제 쓸데없는 소비로 도파민을 공급하는 것보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거나, 정성스레 꾸며진 공간에 가거나, 몸과 마음을 샤워시켜 주는 자연으로 나가거나, 정갈한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들이 나를 더 충만하게 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난 아직도 이상한 소비를 많이 하고 돈 쓰는 것을 좋아하며 여전히 질 나쁜 옷을 사고, 술로 몇 만 원을 날려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밤 11시에 장바구니에 옷을 담아 두더라도 바로 결제하지는 않고 몇 날 며칠을 더 고민한다. 더 좋은 차를 몰고 싶은 욕망은 있지만 지금의 내가 중고 모닝을 몬다고 해서 주눅이 들진 않는다. 스스로를 충만하게 하는 법, 어딜 가도 당당한 사람이 되는 법을 제주도가 조금은 가르쳐준 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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