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직장인 상담일지 2
나의 불안은 어디서 왔을까?
"불안을 이겨내고 싶어요." 상담소를 찾은 이유를 묻는 상담가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최근 들어서는 과호흡까지는 없었지만 이유 모를 불안 때문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어떤 게 그렇게 불안하세요?"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한동안 입을 꾹 닫고 머릿속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다가올 임신, 출산, 업무평가부터 해고, 노후파산에 대한 두려움까지... 나를 겁주던 단어들이 순서대로 떠올랐다.
"왜 그런 불안이 생겼을까요?" 겨우 서른다섯에, 그것도 대기업이라 불리는 회사에 다니며 노후파산까지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상담가는 물었다. 지난번 정신의학과에서 경미한 '불안장애'를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불안은 요 몇 년 일하다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왔을 것이라고.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드렸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성별로 인해 차별을 겪었던 어린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학생 시절, 그리고 입사해 상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이야기, 결혼 후 느끼는 부당한 상황까지. 이를테면 인생 그래프 0 아래의 이야기들이었다. 아마도 그게 불안의 씨앗이 되었을 테니까. 지금부터 이어지는 나의 이야기는 조금 어두울 수 있다. 가감 없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어둠을 걷어나가는 과정을 들려주기 위함이다.
그림자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와 외할머니는 죄인이 되었다. 나는 아들이 태어났어야 할 장남의 집안에서 (무려) 두 번째 딸로 태어났다. 나의 성별을 알게 된 할머니는 집에 와 대성통곡을 했다. 내가 태어나던 날도 사돈 볼 면목이 없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를 셀 수 없이 들었다. 어린 내가 "나 잘못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한 건 당연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단히 눈치를 봐야 했다. 이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불안의 기억이다.
나의 20대는 일에게 잡아먹혔다. 아빠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던 엄마는 일터로 나가야 했다. 친할머니가 위독하시던 날, 엄마는 뒤늦게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달려왔다. 엄마가 감추던 그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자 명품백을 하나씩 선물 받고, 성형수술을 하고, 이 교정을 시작했다. 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학자금을 어깨 위에 얹고, 버스에서 빵으로 저녁을 때우며 하루에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용돈을 벌었다.
25살, 가스라이팅과 번아웃을 겪었다. 취업을 했지만 한 달에 100만 원씩 학자금을 갚아야 했다. 작지만 조금씩 집에 용돈도 가져다주니 내 손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15살 터울의 상사는 나를 답답해했다. 각막염으로 한쪽눈을 못 떠도 야근을 해야 했고, 후두염으로 목소리가 안 나와도 전화를 시켰다. 하루에 화장실을 한 번도 가기 어려워 방광염이 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굳어버린 상태’를 경험했다. 정신이 번뜩 든 것은 제삼자에게서 "너, 돈이고 뭐고 이러다 죽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고, 그대로 퇴사를 통보했다.
빛과 그림자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상담실 테이블에 구겨진 티슈가 산처럼 쌓여갔다.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묵묵히 듣던 상담가는 “그런 일들을 모두 겪어냈다니 정말 대견하네요.”라는 말과 함께 “현재는 어떠세요?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체로 만족하지만, 아직 과거 일에 대한 슬픔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어떤 불행이 다가올지 모르는데, 그 또한 이겨낼 자신도 없다고.
“모든 일엔 빛과 그림자가 있어요.” 상담가가 말했다. 나쁘기만 한 일도 없고, 좋기만 한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자에서 빛을 찾아내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했다. 상담가는 나의 그림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 여자아이라서 차별받고 눈치 봐야 했지만, 오냐오냐 자라서 눈치 없는 어른이 된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랬다. 그림자를 들춰보니 빛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 건 아들을 낳지 못해 핍박받은 엄마의 체면을 살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덕분에 남부끄럽지 않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학자금과 용돈을 스스로 해결한 덕에 재정적 독립을 해냈다. 재정적 독립은 곧 정신적 독립이기도 했다. 덕분에 부모님도 나를 어른으로 대하고, 언제나 내 결정을 존중하셨다. 그뿐인가, 첫 직장을 뛰쳐나온 덕분에 3개월 뒤 훨씬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무려 8년을 즐겁게 일했다. 더불어 ‘몸 상하면서 다닐 회사는 없다’는 나만의 철칙을 세울 수 있었다.
빛을 찾아 남기다
그림자에서 빛을 찾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놀랍게도 나 자신에게는 한 번도 이 말을 건네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어른이 과거 일로 징징대는 거 아니다’란 식으로 감정을 묵히고 있었다. 상처로 남은 과거에 대해 스스로와 대화하고, 화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상담가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많은 그림자들이 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연습한 대로, “그래 그랬지. 그 안에 어떤 빛이 있었을까?” 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는 그림자에서 빛을 찾아 남길 수 있다. 오늘의 나를, 앞으로의 나를 만드는 건 그림자보다 빛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는 찬란한 미래로 가기 위한 여정일 뿐이다.
나의 상담 목표는 ‘불안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이 아주 멀지만, 그 첫 단추를 잘 끼운 듯했다. 여러분도 두려워 마주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면 떠올려보고, 그 안에서 빛을 한번 찾아보았으면 한다. 혼자 하기 어렵다면 친한 사람이나 상담가와 대화를 통해 찾아보아도 좋겠다. 그때 그 그림자가 당신 몰래 두고 간 선물을 꼭 찾길 바란다.
<10년 차 직장인 상담일지>는 '모닝글쓰기클럽(모글클)', 그리고 '모닝모닝클럽(모모클)'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