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잃지 않고
" 엄마, 과외도 했었어요? "
" 응~, 칼국수집이 일식집으로 바뀌면서 저녁장사가 되어버렸잖아. 낮시간을 그냥 비어둘 수가 없었지.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간간이 과외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그때도 과외가 들어왔었어."
" 야~ 우리 엄마 대단하네. 투잡을 뛰신 거네요."
" 그랬지. 낮에는 과외하고 밤에는 일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쉽지만은 않았어. 나도 한창 놀 나이였잖아~. "
" 돈은 많이 벌었겠네. "
" 응. 한 달 120만 원 정도. 엄마에겐 무척 큰돈이었어. 부지런히 모아야 했지. 그래야 학비도 용돈도 계속 충당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엄마는 지금 생각하면 과외보다는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가 훨씬 나았던 것 같아. 초등학생 과외는 1명당 일주일에 2시간 정도, 2번 정도 하면 당시에 월 15만 원 정도 받긴 했는데, 판매나 홀서빙처럼 사회 경험을 간접적으로 하는 기분은 들지 않잖아. 시간당으로 계산해도 과외가 훨씬 돈을 많이 주지만 몸은 고생해도 마음은 알바가 훨씬 편했던 것 같아."
세상에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한 일이 있을까 하고 혜림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노동의 대가를 치르고 그에 합당한 임금을 받는 일의 구조에서는 거의 그런 직업은 없겠지. 많은 직장인들이 과로사나 스트레스로 어려움을 겪는데 그 누가 예외일 수 있겠는가. 또 혜림이 과외보다 알바를 선호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과외는 학부모의 눈치를 엄청 보게 돼. 면전에서 직접적으로. 시험결과도 바로 영향을 미치고. 알바는 실수해도 가게 상황만 나쁘지 않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기회가 있잖아. 으~~, 엄만 과외는 싫다. 돈을 암만 많이 주어도."
혜림은 머리를 절레절레 돌렸다.
" 엄마가 분당에서 초등학생 2명을 과외한 적이 있었어. 가르쳐 보면 대번에 알지. 누가 정말 공부 머리가 있는지. 공부도 재능이긴 하잖아. 그렇지만 가르치는 아이의 자존감이 더 관계가 있다 생각해. 엄마가 가르친 두 학생은 다 머리가 좋았어. 하지만 한 아이는 부모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는 듯했어. 공부를 잘해도 옆에서 자꾸 닦달하면 하길 싫잖아. 결국 성적에도 영향을 끼쳤지. "
" 압박을 받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 공부할 때 보면 알아. 표정이 밝은지 굳어있는지 보면."
" 표정이 굳은 아이의 집에 가보면 현관에서부터 그 집 분위기가 느껴져. 우선 공기가 무겁고 답답해. 가구는 고급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 몰라도 내리누르는 뭔가가 있어. 아직도 그 학생의 엄마가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동안 거실 저만치에서 미동도 없이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던 모습이 떠올라. 뒷모습만 보이는 데도 섬찟했어. "
" 그것만 가지고 어떻게 알아?"
" 그 아래로 일곱 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거든. 한 번은 피아노 학원에서 막 돌아온 딸이 놀아달라고 그 엄마에게 매달리는데, 방으로 그냥 밀어다 놓고 배운 것 복습하라고 하더라고. 아이는 싫다고 우는데도 완강히 말이야. 엄마는 문고리를 잡고 안 열어주고. 아이는 싫다며 문을 때리며 울부짖고. 그 엄마에게는 어떤 나름의 강한 틀이 있는 것 같았어. 자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숨 막혀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니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냐고."
" 울 엄마는 천사네~~~. "
" 그러니 공부 좀 더 열심히 하세요~~~. 난 좋은 엄마라고. 스스로 열심히 할 때까지 기다려 주잖아."
" 그래서 그 애들 성적은 잘 나왔어요?"
혜림은 바로 울상을 지었다.
" 성적은 둘 다 잘 나왔어. 그런데 그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2문제를 더 틀린 거야. 그게 엄청 기분이 나빴는지 그 엄마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갑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서는 30cm 자를 들고 손바닥을 철썩철썩 때리더라고.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나한테 경고하는 소리 같았어. 우리 아들을 만점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야. 더 이상 그 과외는 지속할 수 없겠더라고. 그래서 그런가? 그 이후론 과외가 들어와도 부모님들을 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어. 그렇지만 분당이든, 성남이든 자식 성적 앞에서는 다 예민하더라. 돈을 주고 과외를 시키는 거니까 직접적인 내색은 그 엄마처럼은 안 했지만 결과가 안 나오면 표정에서 다 보여. 과외도 많이 긴장해야 해...... "
혜림은 귀를 쫑긋하며 듣고 있는 아들에게 이어 말했다.
" 한참 뒤에 우연찮게 두 아이들의 소식을 들었어. 웃으며 즐겁게 잘 따라왔던 아이는 결국 의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한 번은 재수를 했다고 하더라고. 의대가 어렵잖아. 그런데 내가 걱정했던 그 아이는...... "
혜림이 뜸을 들이자 혜림의 아들은 빨리 말하라는 듯이 엄마 앞으로 몸을 더욱 밀착했다.
" 사춘기 때 엄청 반항하다가 결국 공부를 놓아버렸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 뒤론 소식을 모르고. 두 개만 틀려도 칭찬은 고사하고 다른 아이랑 비교해서 매를 맞았는데, 그 아이의 자존감이 어떠했겠어? 점점 바닥으로 추락했겠지. 그러면서 자기를 잃어버린 거야. 어쩌면 그 분노를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복수했는지도 모르고. 그러니 울 아들은 지금 행복한 거야. 엄마가 걱정되어서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좀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잖아. "
자존감. 자신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판단, 신념, 이미지. 이 자존감은 건강하지 못한 타인이나 열악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얼마든지 뭉개질 수 있는 것임을 혜림은 과외를 통해 피부로 경험한 터였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사회적 위치, 소유, 성적 등이 아닌 삶, 생명, 존재와 관련된 것인데, 역시 자존감이 낮은 까다롭고 비판적인 부모는 자녀에 만족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거나 완벽해지길 요구하며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혜림은 앞에선 그렇게 말했지만 아들에게 자신은 진정 어떠한 엄마로 비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부모님이 갈등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혜림 자신은 부모님이 잔소리나 야단으로 혜림을 깎아내린 기억은 없었기에 오히려 자율적, 독립적으로 더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부모님을 통해 좋은 긍정적 메시지로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좋은 책을 가까이 함으로 그 결핍을 채웠기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았고, 그래서 가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알았고, 상황판단 능력, 자기 조절 능력,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인내와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존감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림은 자신의 이러한 면이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랬다. 그것이 성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그리고 나서 자신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아들의 손을 따뜻이 잡아 주는 걸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