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의 태도들
26살의 남성의 몸은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 요즘엔 조금만 덥다고 느끼면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나이만큼 땀이 늘었나, 푸념하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샤워를 한다. 욕실로 가면 익숙하지만 보기 좋았던 시절의 내 모습과는 조금 달라진 내 모습이 보인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딘가 지쳐 보인다.
미온수로 더운 몸을 닦는다. 기분이 좋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 애매한 온도는 내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온도이다. 세신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잊고 나는 잠시 시간 여행을 한다. 샴푸 꼭지의 스위치를 누르고, 눈을 감으면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시간 여행은 언제나 부끄러운 시간대로 돌아간다. 뚜렷하고 부끄러운 것들. 예를 들자면, 학창 시절 비겁했던 기억들, 이 전의 연애 시절 찌질했던 기억들.
오늘 나를 창피하게 만든 기억은 복학을 한 직후의 나.
당시의 나는 '뭐든 해야 된다'라는 초조함과 '뭐든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아슬하게 뒤섞인 상태였다.
우리 학과에는 1년마다 진행하는 학술제가 있다. 우리 과 학생은 물론이고, 타과 학생들도 재미있게 참여하는 행사였으므로, 꽤 큰 행사 중 하나. 이 학술제를 문제없이 진행해야 하는 위원 자리에 아는 형 A와 함께 지원했다. 우리 팀을 포함해 2팀이 나와서 경쟁 프레젠테이션 발표와 투표가 불가피했다. 3주가량 이 행사를 위해 이전의 위원들로부터 자문도 얻고, 계획도 짜며 시간과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발표 당일. 실수 없이 무사히 발표를 끝내고, Q&A 시간이었다. 이 일을 기억하면 그 앞에 아름다웠던 노력의 시간들은 스킵되고 이 시점부터 기억이 시작된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길래, 나름의 위트를 부린다며 나온 나의 무리수.
"질문할 게 없으시면 제 군 시절이라도 물어보셔도 됩니다." (^^)
^^ 이 가증스러운 이모티콘이 필수다. 실제로 저 표정을 지었으니까.
센스를 쥐어짜 냈다고 생각했으나 나와 같은 처지였던 아는 형 A의 당황한 얼굴을 본 순간.
그리고 찬물을 끼얹은 듯하다는 표현이 실현된 공간.
무리수가 실수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나는 남들 앞에서 군대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하게 됐다.
과거 시간 여행은 저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나는 창피함에 '어으~~~'하고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잊고 싶어서 세차게 샴푸질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는 왜 행복한 순간 말고 창피한 순간들을 떠올리지?'
이제는 조금 이해받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남이고, 어렸을 때부터 반마다 있는 '똑똑한 아이'로 통했고,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반장과 부반장을 역임했으며,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나에게 완벽을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나의 '부족함 없어 보이는 모습'들은 다른 사람들의 호의와 칭찬을 이끌어냈다.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의 열정적인 숨김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창피함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창피함을 느끼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내가 개발한 <창피를 피하는 방법> 유형이 2개가 있다. 시기적으로 나눈다면, 어린 시절 (초등학교 ~ 고등학교)과 청년기 (스무 살~현재)로 나뉜다.
어린 시절 내가 채택한 유형은 스스로 '높아지기'. 성적을 우수하게 받아 '똑똑한 아이' 칭호를 획득하면 반에서 내 의견은 무시할 수 없게 됐고, 여기에 반장이나 부반장 같은 소스들을 찍어 먹는다면 나는 더 빠삭해지는 아이가 됐다. 스스로 높아지는 것. 어린 시절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좋은 점들도 많았을 텐데, 청년기에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내가 버렸다. 그래서 내가 채택한 2번째 방법은 바로, 창피를 예방하는 가장 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인,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빗물이 바위를 뚫듯, 지속되는 일들이 19년 간의 나를 바뀌게 만들었다. 내가 경험했던, 대학이라는 사회 공간에서 선후배, 친구 관계 맺기가 매우 달랐다. 선을 몰랐던 나는 누군가에게 말실수도 하고 행동 실수도 하면서 모든 게 어려웠다. 저마다 성숙하게 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와 비교되는 친구들을 보며 선을 몰랐던 내가 선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과 선으로 이루어져 어떤 도형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게 맞나?' 싶어서 옆 친구의 형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나는 탄생했다. 남의 것을 보며, 눈치를 보며, 괜찮다는 것들, 별로라는 것들의 데이터를 수집했고, 구분했으며, 배제했다. 내 색깔 어쩌고 하는 청춘이라는 시기에 나는 친구들에게 물감을 빌리고 있었다. 나쁜 점만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부족함을 '감추어서', 나는 남들에게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거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자라던 내가 사실 얼마 전에 아차, 싶었다. 학교 현장실습 인턴십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광고 회사에서 나처럼 회사에 새로 입사하신 Y 차장님과 둘이 일하게 됐는데, 그 분과 있었던 일화를 통해 괜찮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괜찮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쨌든 처음에 잘 보이고 싶기도 하고, 직급이 워낙 차이나기도 했고 나는 예쓰 & 땡큐 맨을 자처했다.
하루는 일이 몰려 좀 지쳤을 때였는데, 차장님께서 또 일을 주시면서 "지금 일이 좀 많으니까 이건 좀 나중에 줘도 돼~"라고 하신 말에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차장님이 한 마디 날려주셨다. "고마워할 일에 고마워해 ~ 너 나중에 진짜 고마운 일에는 뭐라고 말할래?"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인턴 계약 연장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꽂힌 말. "너는 잘하는데 ~ 아직 뭔가 안에서 안 깨진 것 같아 ~ 이곳저곳에서 굴러보면서 그거 깨지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 그래서 좀 힘든 곳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정돈되지 않은, 문장들을 날리는 말투지만 진심이 가득했던 그 말들이 나에게로 와 닿았다.
그 말들이 내 마음에 더 와 닿을 수 있었던 건, '내 취향은 뭐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라고 나에게 근본적으로 묻는 시간들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남의 기준들을 보며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점점 희미해져서 구별이 되지 않았다. 솔직함이 부재했던 삶은 내 삶의 기준들을 허물어나갔다. 가령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 기준 없이 남에게 이거 살까, 말까. 저거 살까, 말까. 고민하는 나의 모습, 결정이 안 되는 나의 모습은 남들과 비교하며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괜찮지가 않아졌다.
잘못한 일에는 마땅히 창피함을 느껴야 하고, 창피함은 개개인을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창피함엔 진짜 잘못을 했을 때 창피한 것과 나 혼자 뻘쭘해하는 것이 있다. 그동안 나는 솔직한 모습을 부족한 모습이라고 치환하며 창피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창피해했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인가? 나를 표현하는 것인가? 의 질문에 답이 없으니 '내 취향은 뭐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같은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 거였다. 나의 삶의 기준들을 만드는 솔직함을 방해했던 건, 창피함의 과잉이었다는 것. 사실, 복학하고 날린 나의 드립은 센스도 없고 구리지만 귀엽게 봐줄 수도 있는 문제다. 이제는 복학한 티를 안내기도 하니까 괜찮다.
이왕이면 나를 겪은 사람들에게 "아직 뭔가 안에서 안 깨진 것 같아 ~"나 "고마워할 일에 고마워해~"라는 말보다 "솔직해서 좋아."라든가 "너 만의 기준이 확실한 것 같아."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억들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창피한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나 스스로 솔직해지기 위한 나도 모르는 내적 시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솔직해지는 건 창피하고, 창피해지는 건 싫지만, 이제 창피한 기억이 떠올라도 신음 섞인 울음소리는 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