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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즈맨 Jan 08. 2024

위시 감상기 : 모든 소원이 선하다는 착각

새로운 해의 처음으로 본 영화는 <위시>였다. 디즈니의 100주년 기념작이라고 한다. 디즈니 영화 초반에 오프닝으로 나오는 별이 빛나는 디즈니성은 서른살이 된 나의 마음을 아직도 두근거리게 만든다.


 


다만 결말과 내용은 조금 아쉬웠다. 지금도 좋지만, 디즈니라면 더 좋게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오만함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 친구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내 말에 무조건 반대하며 자신의 생각을 설득을 넘어 강요하는 친구의 태도를, 당신은 <오만하다>라고 느끼지 않을까? 가벼운 대화면 몰라도 다음에 그 친구와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위시의 주인공이 ‘소원’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마치 그렇게 느껴졌다. ‘나의 소원은 나만의 것이며, 그 소원은 내가 꼭 이뤄야 한다’라는 논리와, ‘100살의 생일이 된 우리 할아버지의 소원은 꼭 이뤄져야 하며, 내가 내용을 보니까 순수하다.’라는 논리로 전까지 평화롭던 왕국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왕국을 다스리던 왕 역시 타락해 버린 시점에서 ‘순수해 보이는’ 주인공이 이기는 스토리가 아무래도 더 나아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논리가 틀린 건 아닐까?’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는 주인공과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100% 선()하다’라는 오만이 느껴졌다.


 


‘모든 소원은 선하다’는 착각


 


소원은 그 단어가 가진 순수성 때문에 자칫 사람들에게 선한 단어로 인식된다. 영화에서 나온 소원들을 생각해 보자 : "하늘을 날고 싶어", "사람들 앞에서 멋진 연주를 하고 싶어", "멋진 용사가 되고 싶어", "높은 산을 정복하고 싶어”. 실제로 저런 소원만이 가득한 사회였다면 왕은 왜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을까? 분명 사람들이 그런 유아적 소원만을 가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디즈니의 상상 같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보자. 우리의 소원은 모두에게 선한가? “네 마음 속 소원은 네가 이루는 게 정답"이라는 <위시>의 영화적 메시지는 "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라는 소원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돈은 잘못이 없지만, 돈이 동기가 되는 소원은 정말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성취감 없는 소원


 


(관객들은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는) 자신들의 소원을 되찾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왕에게 자발적으로 주었다가 되찾은(?) 자신의 소원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소원을 아름다워한다. 물론 나도 사람의 소원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소원을 어떤 목적으로 가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지, 소원과 소원을 이뤄나가는 과정은 타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자신의 소원에 대해 숙고해보는 과정이 <위시>엔 없다.  위에서 든 부자를 예시로 들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누군가는 인류에게 필요한 굉장한 발명을 해서 부자가 될 수도 있다. 그 반대편에는 인건비나 재료비가 저렴한 국가에서의 이익을 취하며 부자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소원은 왕에게 빼앗긴 것도 아니다. 주인공이 소원을 해방한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은 다시 소원을 품게 됐을 뿐이다. 능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능동적인 것은 없다.


 


사랑이 없는 관계


 


왕국에 자신 말고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금지된 마법을 뒤적거리는 왕은 사실 지금껏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고, 다스리는 나라의 영향을 고려한 사람이었다. 왕의 판단력이 어땠는지에 대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주인공이 ‘오해’하여 왕을 무찌르려고 하기 전까지는 만족하며 사는 왕국이었다. 인자했던 왕은 영화 중반부부터 자신의 권력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어있었다. 수년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왕과 함께 왕국을 지켜오던 왕비의 변심 역시 나는 다소 충격이었다. 한 번 말렸다고는 하나 일말의 미련도 없이 포기하는 왕비의 모습에는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가? 아무렇지 않게 남편이 갇힌 지팡이를 벽에다가 걸어두게 명령하는 그녀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소원을 현실화하는 더 나은 방법


 


할아버지의 소원을 본 주인공이 마음을 다르게 먹고 왜 할아버지의 소원이 위험한 것이지 생각해봤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할아버지와 함께 이뤄보자! 라고 생각할 순 없었을까? 인자했던 왕을 금지된 마법을 취하는 악당으로 만들어 단지 전투와 갈등을 유발하지 말고, 자신의 판단에 갇혀 있던 왕이 왕국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소원의 목적과 소원을 이뤄가는 방식을 고민하는 연구소를 주인공이 차린는 건 어떤가? 100살이 되는 시간까지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고 가족과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희생 정신은 누가 알아줄 것인가? 


 


‘나만의 소원’이라는 단어에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라는 조건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가? 디즈니가 시작된 100년 전에 비해 시대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뉴스든 일상 대화든 순수함이 없어졌다고 많이 한다. 그런 시대에, 단지 소원이라는 정의 하나로 만족하는가? 더 나은 소원은 무엇일까?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방식이 무엇일까?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디즈니의 기념비적인 100주년 영화는 나에게 더 의미가 생길 수도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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