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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Sep 10. 2023

현기영 장편 ”제주도우다“

- 소설로 읽는 제주 4.3 교과서

   해방이 되자 오키나와에서 맥아더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고 물었을 때 제주사람들은 “ 우린 제주도다”라고 답했다. '제주도우다'는 제주도입니다라는 뜻이다.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라고. 4.3도 오랫동안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하며 긴 세월 강요된 침묵 속에 있었다.


 40여 년 전 중편소설 “ 순이 삼촌”으로 그 침묵을 깬 현기영 소설가는 장편 “제주도우다”(1-3권, 장착과 비평사)를 83세에 우리 앞에 내놓았다. 이 책은 당시 16세 소년으로 4.3을 겪은 안창세 할아버지가 열흘간 손녀부부에게 들려주는 액자소설로 소설 내용은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새콧할망당이 조천포구에 정좌하게 된 내력으로 시작한다. 대맹이(큰 구렁이)가 파손된 배를 몸으로 틀어막아 구한 이야기, 흰 쥐들의 행진, 아리따운 여성으로 변신한 대맹이의 처녀 유령, 왕뱀에 먹힌 두꺼비의 서사등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소설 전체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으로 제주도 유일의 포구 조천포는 해상무역을 독점하여 김해 김 씨가 토호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제주도 일반 백성의 삶 위에 군림하던 그들은 신축민란의 가해자로 백성의 응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부는 자식들 유학 자금이 되어 그들은 신학문이 가져다준 “자유와 평등‘에 심취했다. 김해 김 씨의 자손인 김명식이나 김문준 등이 제국주의로 팽창해 가는 일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며 항일운동을 할 때 자본가로 성장한 자신들의 아버지에게도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식민지민족해방을 위한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여 실천한 사람들이다. 조천의 지식인들의 또 하나의 흐름은 ‘우리 계 사건’처럼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이다. 이 소설에서는 장영발이나 대장장이 털보가 대표적 인물이다. 군대환에 대항하는 복목환 자주운항운동도 무정부주의자 고순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인물들이 4.3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쉽게 드러나지 않으나 그들의 독립주의는 4.3의 원인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

  

 안창세 할아버지는 덕이 높은 부자 선주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는 기울고 창세 어머니 재봉틀 업으로 살림을 꾸린다. 여기 걸출한 여장부 창세누나 안만옥이 있다. 진상할 100 필의 말을 배에 싣고 전남 영산포구로 드나드는 기개 찬 여성이다. 그리고 상군해녀 양갑추가 나온다. 그녀는 “ 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쓰는 것이 해녀 인생이디... 바다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라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해녀들을 독려하며 경제적 가장의 역할을 하는 해녀들을 이끈다. 이 해녀들의 남편은 대부분 4.3의 주역이 된다.




 강요배 <해방> 39.0*55.0, 종이. 펜, 1990


 2부는 해방정국을 그리고 있다. 해방으로 제주는 한라산 오름에 동원된 징병 1만 1천 명과 노무자 6천 명이 풀려나고 탄광 징용자, 해외 거주자 6만이 귀향한다. 또 독립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온 세상 온 우주가 환희로 들썩이는데 독립운동가 안세훈, 김류환, 현사선이 출감하자 조천리에서는 귀환 축하대회 돼지 잡기 환송회가 벌어진다. 흥건한 음식과 더불어 ‘청년의 시대’를 지지 격려하는 노투사의 발언들 속에 나누는 돗 추렴(돼지를 민가에서 잡아 나누는 일) 음식 축제, 5쪽(1권 310~315)에 걸쳐 전개되는 돼지 잡기 광경은 한 편의 문화인류학 서사시 같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인 귀환자들에게는 조선은행에 예금한 돈 전부를 인출할 수 있도록 했으나 조선인 귀환자에겐 담배 스무 갑 이하에 해당하는 액수만 허용했다. 일본 노동의 하부구조에 편입되어 애면글면 모은 돈은 고향의 경제에 보태지도 못하고 해방 후 불어난 인구로 먹고살 길은 더 아득해지자 다시 고향을 떠나는 자들도 생겨났다. 일본도를 잠시 맡아주면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호언하는 장교의 말은 새 나라의 운명을 예감케 했다.   

“ 쳇, 이 전쟁에서 당신들이 이겼나? 우리는 싸움에 졌지만 당신들한테 진 게 아니고 미국한테 진 거야! 우리가 당신네를 미국한테 인계하고 가는 거라고. 정신 못 차리는 것들!(1권 363쪽)”


 소설 “제주도우다”의 공간은 조천면 일대로 해안마을 조천리에서 중산간 마을 대흘리까지다. 대흘 2리 구장은 창세의 외삼촌 양산도이다. 양산도는 역사적 통찰력으로 일본이 언젠가 망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다. 마을 유지와 청년들은 면사무소를 인민위원회 간판으로 바꾸며 새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민은 “모든 식량, 모든 물자를 생산하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몇 달도 안 되어 순사 짝귀는 경찰서 행정직이 되고 마을에서 쫓겨난 하이하이 면장을 도청과장으로 발탁하는 미군정의 정책을 보게 된다.  


 그렇게 1945년이 가고 1946년이 시작된다. 이제 제주도는 22만 인구가 27만이 되었다. 3부, 4부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대흘리 주변 목초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펼쳐진다.

 

인민위원회가 우선으로 했던 교육 사업으로 소학교(초등학교)가 두 배 늘었고 중학원이 5군데 세워진다. 조천중학원이 설립되는 과정이 실감 나게 펼쳐지고  무보수로 일하는 교사들의 열정으로 장가간 늦깎이 학생들도 배움의 열기 속으로 들어간다.


조천리 나이 든 측들은 무정부주의를 선호했다. 대장장이 박털보는 ”곡식은 사상이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비,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키운다 “고 사회주의 사상의 젊은이들을 비판한다. 일본인 아내를 둔 아나키스트 장영발도 ” 좋은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며 ”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국가 안에 살더라도 가능한 한 국가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 자치인으로 살아보자는 뜻“이라고 젊은이들을 설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넘어 1946년의 제주는 66일의 극심한 가뭄과 콜레라로 얼룩진 한 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노당제주도위원회는 출범한다. 미군정에 등록된 합법 대중정당이었다.   

 

강요배 <양과자 반대시위> 38.7*54.0 종이. 콘테, 1991


제주도 최초의 반미시위는 양과자 수입 반대시위이다. 1947년 2월 10일 제주읍내 학생들은  “조선을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고 시위를 벌였다. 당황한 미군정은 응원경찰을 불러들여 조천지서에 8명 배치했는데 이들은 10월 항쟁 토벌 경험을 가진 충남부대 소속 경찰이었다. 나는 가끔씩 1947년의 그 인파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작가도 그 부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으리라. 경무부의 한 경찰간부는 “친일경찰 80%는 민중의 80%가 좌익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3.1 대회 발포사건 항의 총파업을 계기로 미군정은 사과 대신 포고령 법을 들이대며 적극 가담자는 파면시키고 젊은이들을 체포 고문하였다.


 6부는 조천중학원 학생 김용철의 고문치사로 시작된다. 작가는 1948년 3월에 있던 2명의 고문치사와 한 청년의 처참한 시신으로 4.3의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용철의 시신이 집 마당에 들어설 때 따라온 마을사람들의 “마당 가득 숨죽인 침묵이 ‘스무 살 김용철이 맞아 죽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3권 64쪽)”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 나와 세계가 하나였던 열광의 시간, 이제 그 세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분노는 자기 파괴의 불씨, 먼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기질에 불이 붙고 만 것이다. (3권 71쪽)          


  6부를 아우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입산할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다. 항일운동의 주역이 밀려나고 20-30대가 주역이 되었을 때, 젊은이들은 ” 선배님들 시대는 갔수다. 말로만 싸우는 것이 항쟁입니까 “라며 왕대 끝에 날을 세웠고 창끝을 숯불에 굽고 콩기름에 담갔다.   

“ 왜 우리가 반역자인가. 우리는 미군정에 반대한 것이지 민족을 반역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애국이지 왜 반역인가 (3권 95쪽)”  


그러나 무력항쟁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똑같은 형태의 살육이 벌어진다.

" 이양일의 머슴 허서방이 돼지 한 마리를 지고 산으로 갔을 때 경찰의 첩자로 의심한 산군들은 전송하는 척, 처형했다. 이 사실은 다른 아지트에 알려져 조천리 입산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우리가 적을 닮아가고 있다고. 그러나 산 군 앞에서는 두려움에 차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6부 170쪽)

강광 < 전쟁반대>


4.3 때 가족을 모두 토벌대에 잃고 외지로 나와 식모살이하며 연명했다는 한 유족은 구술 증언을 마치자 딸뻘인 나의 손을 쥐고 간절히 말했다.

" 이모, 절대로 전쟁은 안 되는 거야"

그분에게 4.3은 전쟁이었다.

  

 7부는 1948년 가을 이후의 상황이다. 이제 산의 상황은 외세에 대한 싸움이 동족 간의 싸움으로 번져간다. 대살(代殺)은 산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산은 패전의 기운이 가득한데 자신 때문에 부모가 죽고 형제가, 아내가 대신 죽어갈 때, 산에서는 자수를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강요배의 <부모들>, 130.3*162.1, 캔버스 아크릴릭, 1992


 “그것은 항쟁의 대의를 배반하는 일이었고, 자수했다고 다 용서받는 일도 아니어서 자수자 중 절반은 죽음을 각오해야 해서 입산자들의 심적 고통은 더없이 컸다(3권 243쪽)”


  이제 산사람들은 추위와 허기에 본능만이 지배하는 삶의 연명에 맞닥뜨렸다. 산도 무섭고 토벌대도 무서운 긴 시간을 거치는 동안 마을사람들까지 산사람을 폭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분단정부가 들어선 1948년 8.15일 이후의 산에서의 투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작가는 이 상황에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항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절망의 시기에도 입산하는 교사 정두길이 있었고 가족 모두를 잃은 양산도는 산부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웠다. 지휘계통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그들은 홀로 싸우고 홀로 죽어갔다(3권 305쪽)“ 는 대목에서 나는 오랜 시간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토벌대에 잡힌 정두길은 연인 따알리아의 도움으로 석방됐지만 따알리아가 산의 피습으로 죽자 다시 입산하여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부대림이 숨은 동굴로 들어간다. 폐결핵으로 격리되어 혼자 있는 부대림과 굶주림으로 함께 죽어가는 장면은 소설 전체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정두길이 제자 안창세에게 준 만년필은 이제 안창세 손녀에게 넘겨졌다. 이 젊은이에게 기록의 새로운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방대하고 탄탄하고 꼼꼼한 취재력은 영원한 청년의 모습으로 노작가의 나이를 잊게 한다. 그 치열한 작가정신에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작가는 숫자나 연도 사건에서는 소설적 형상을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 “ 제주도우다”는 ‘소설로 읽는 4.3 교과서’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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