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 아버지 같은 절

by 양경인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의 압권은 역시 극락보전이다.

어느 절을 가든 용솟음치듯 올라간 용마루를 흔하게 보아서인지 끝이 둥글리듯 수굿한 지붕마루의 선은 욕심으로 뒤엉킨 내 심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천불전을 내려오면서 극락보전 여닫이 서쪽 창문이 반대편 동쪽 창문과 일직선으로 만나면서 보는 가지가 휘일 듯한 녹음도 좋았지만, 옆 면에서 보는 맞배지붕의 간결한 구도, 나무로 공간 구분만 간결하게 처리한 극락보전의 옆모습은 단순미가 보여주는 어떤 경지를 느끼게 하였다. 단청을 하지 않아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문살에 창호지를 바른 풍경이 기억 저 편에 누워있던 30년 전 친정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극락보전 격자 교살 문

추석이 내일모레 다가오면 한옥집 미닫이 문을 떼내어 문틀을 씻어내고 창호지를 새로 발라 그늘에서 말리던 하얀 러닝셔츠 차림의 아버지. 효령대군이 중수하여 수륙제를 거행했던 사찰 법당의 빗살문에서, 13평 한옥에 여덟 식구가 복닥이며 살았던 창호지 문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이 절이 갖는 포용력일 것이다.


무위사를 네댓 번은 갔다. 맨 처음 갈 때 이정표를 따라 나주에서 강진으로 차를 모는 우리 앞에 예기치 않는 풍광이 불쑥 나타났는데, 월출산이었다. 순간 내 안에 안일하게 누워있던 아름다움에 대한 상념들이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골격으로만 이루어진 듯 강건하고 기개에 찬 모습의 월출산은 한라산이나 지리산 같은 흙산의 부드러움으로는 줄 수 없는 어떤 도전적 미의식에 눈뜨게 하였다. '고매한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 개념'이라 했던가. 이런 월출산을 만나는 것도 무위사에 가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구름이 산봉우리를 에워싸는 산을 에돌아 쑥 들어간, 월출산의 가장 완만한 산마루에 무위사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처음 무위사에 간 것은 '벽화 보존각'의 탱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절을 중수할 때, 법당의 외벽에 그려진 고려 말 탱화가 세월에 마모되어 훼손이 커지자 벽에서 떼어내어 따로 관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상 가보니 전시실 내부가 어둠침침하고 보관상태도 썩 좋지 않아, 5-600년 전 화공의 숨결을 느끼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전시실 출구에서 우리 가족은 긴 동굴 속을 빠져나온 것처럼 큰 숨을 토해냈다. 이후 아이들은 스님이 키우는 강아지에 온 신경을 빼앗겼고, 땅거미가 밀려오는 시간에 쫓겨 절을 떠나면서 내 머리에도 벽화의 형상은 가뭇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대신 절 마당의 중앙에 위치한 극락보전 건축물의 담담한 모습이 오랫동안 아른거렸다. 강진은 해남과 가까운 지역으로 백제시대에는 해상교통이 발달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 까닭으로 백제시대부터 명당터에는 절들이 들어섰는데, 무위사도 그런 절이었다.


목조아미타삼존불, 조선 전기 (사진 강진문화원)


법당 안에는 아미타 부처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 목조 삼존불이 있다. 지금은 금빛으로 덧칠되어 나무의 질감은 느낄 수 없으나, 위압하지 않는 불상의 크기나 위치는 그 앞에 절을 올리고 고개를 빼들고 우러르지 않아도 된다. 이 삼존불상은 고려 후기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지막한 연꽃 방석에 앉아계신 아미타 부처님은 바라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불상의 안정함과 편안함은 상체에 비해 큰 무릎 아래의 넉넉함도 일조를 한다. 이 불상을 보며 휘황찬란했던 고려의 귀족 불교를 넘어서 조선 전기 불교의 조촐한 위상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았다.


옆면으로 본 목조아미타삼존불상


앞면으로는 자애롭고 편안한 모습이나 옆으로 보면 꽃미남 같은 외모에 세련미가 돋보인다.


극락보전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 1476년,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는 화면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배치하고, 상단 구름 속에 상반신만을 표현한 여섯 구의 나한상과 4구의 화불(化佛)을 배치하였다. 1476년(성종 7)이라는 제작시기와 조성 주체, 그리고 조성한 작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귀한 벽화다. 고려시대 불화의 특징인 금빛이 감도는 붉은 색체와 신체표현에다 조선 초기 특징인 간결한 무늬와 본존불의 아담한 크기 등 사료가치가 높다. 아마 이 시기 사람들의 정서는 그냥 고려시대의 연장이 아니었을 까 싶다.


명부전의 지장보살과 저승 판관들, 영조시대 추정


극락보전을 마주 서서 오른쪽 뒤 쪽으로 명부전이 있다. 안에는 나무로 조각된 심판관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데, 여느 명부전처럼 눈을 부라리며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형상들이 아니다. 장부를 펴고 생전의 죄업을 낱낱이 훑고 있는 판관들의 모습은 깐깐하지가 않고, 기개 높고 조신한 선비의 기상을 보는 듯하였다. 표정도 어질면서도 청렴한 인상이다. 영조시대의 목조물로 추정된다니 문화가 활짝 피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그 시기의 멋진 사대부 모습을 그려보게 했다.


기와지붕 바꾸기 전 무위사 극락보전


부드럽게 쳐져 내린 지붕마루, 단청이 거의 퇴색된 처마, 소슬 빗살무늬 문살의 잔잔함, 맞배지붕 측면의 황금률의 구도, 명부전의 저승 심판관까지, 그 모든 것들이 '알맞다'는 느낌을 주는 곳. 그리하여 '알맞다'는 것이 지고한 아름다움임을 조용히 보여주는 곳. 무위사에서 나는 삶의 절제와 균형을 생각한다. 겸손이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임을 배우게 된다.

기와를 새로 단장한 무위사 극락보전

몇 년 후 다시 갔을 때는 극락보전이 무거워져 있었다. 왜 그럴까 한참 돌아보다가 기와를 새로 했다는 걸 알았다. 옛 기와는 수제 기와였고 지금 단장한 기와는 공장에서 찍어낸 기와여서 그렇게 보인 것이다. 단청도 기와도 새로 한 절에 가면 느끼던 생경감의 정체도 원 재료의 생산 공법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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