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천천히 걸어보자고 친구들과 뜻을 맞췄다. 3월 초, 아직은 겨울 한기가 남아있고 사람들이 새 학기로 분주할 때니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한몫했다.
3월 초 경주 오릉 주변 풍경
사전 지식 없이 여행 가는 습관은 전남 구례 연곡사에서 <동부도>를 본 후부터 일 것이다. 그때 연곡사 부도에 대한 지식이 많아 내 눈과 마음이 본 것인지, 남의 글이나 말에서 전이된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온전한 나의 감상을 방해하던 지식들은 안녕. 그 후 나의 여행 답사는 ‘새로움’이 덕목이 되었다.
1959년 남산 철와 골에서 발견된 불두, 8세기 말 ~ 9세기 초 추정, 국립경주박물관 마당
여행 첫날, 에밀레종 뒤로 장엄한 노을이 사라질 때까지 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을 찬찬히 보았다. 전에 스치듯 보았던 박물관 불상들 중 기억에 새겨진 것들은 대부분 남산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문득 스치는 의문, 그러면 지금의 남산은 진액이 빠져나간 공간일까? 박물관에서 본 불상들을 남산에 놓아 보리라 생각하며 눈에 단단히 담아두었다.
남산은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한다. 조선 전기 유학자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단편소설 "금오신화"를 쓴 곳이다. 남산은 산 정상이 494m로 높지 않지만 60여 개의 계곡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불상들은 ‘ ~령 ‘ ‘~ 골 ‘로 표기되어 있다. 신라인들은 그 골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부처를 새겼다.
남산 용장골에서 출토된 불두, 7세기 추정, 국립경주박물관
이번에 남산을 꼭 오르고 싶었던 것은 고대 신라인들이 불국토로 만든 곳이 궁금해서였다.
경주는 여러 번 갔지만 아이들과 동행하느라 때로는 경주의 수많은 문화유적에 짓눌려 남산까지 못 가고 마무리되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경주를 1/10도 못 본 것 같아 늘 허전하였다.
골품제가 뿌리 깊게 각인된 신라에서 선택받은 자들이 살았던 경주, 그들은 집집마다 기와를 얹고 숯으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그 밥을 만들고 바쳤던 사람들은 경주시내 화려한 절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을까. 남산의 불상과 마애불, 석탑으로 가지 않았을까? 귀한 쌀 몇 되라도 이고 가야 면목이 서는 절이 아니라 마음만 들고 가도 되는 기원의 자리, 나는 그곳이 보고 싶었다.
박물관에 오도카니 있는 이 불상을 보며 남산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선량하고 무구한 얼굴들. 저런 불상 앞에 서 하는 기원에는 큰 욕심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삼존불상 본존불
이 불상은 통일신라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간다라 불상 양식이 도입되기 전이라 신라인의 모습을 그려보기 좋은 불상이다. 앉은 자세지만 옆 보살들의 아담한 체구를 보면 이 본존불의 키도 크지 않을 것 같다. 얼굴이며 옷자락, 손발까지 동글동글하다. 얼굴은 당대의 최고 미남이나 왕의 얼굴을 재현한 듯 미끈 수려하다. 전체적으로 곱고 부드러워 단단한 화강암 재질을 잊게 하는 불상이다.
삼존불상 왼쪽 협시불
얼마나 귀여운지 애기보살이라 이름 자어주고 싶었다. 이 보살을 보면서 어린이의 키라기보다 당시 신라인의 평균 키가 이 정도이지 않았을까 , 6등신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삼존불상 오른쪽 협시불
얼굴만으로 보면 아직 젖내가 남아있는 모습이다. 이런 불상을 찾아가 기원을 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권력자나 지배계급의 사람들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다음날 아침, 새벽 찬 공기를 온몸으로 맞받으며 우리는 칠불암 코스로 방향을 잡았다. 암벽이 군데군데 버티고 있어 집 근처 광교산을 오르면서는 십 년도 더 신을 것 같던 등산화가 낡았음을 예리하게 알려준다. 두어 시간 오르는 길이 내 체력에 벅찼다.
무거운 숙제를 등에 진 것처럼 하산길을 지레 걱정하고 있을 때, 칠불암이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대단한 출현이었다. 순간 육체적 피로와 잡생각들이 싹 걷히고 이 코스를 추천한 벗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웅혼한 모습을 드러낸 칠불암, 통일신라, 남산 봉화골 , 국보 312호
바위의 형상을 최대한 살린 일곱 불상의 모습은 늠름하였다. 연꽃잎 한 장을 불상의 머리에 받쳐 강한 기상에서 느낄 법한 어려움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마애불상들은 연꽃송이를 지그시 밟고 서서 경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꽃잎의 양감이 선명하고 도드라져 1300년 전 제작 당시의 입체감을 상상하게 했다. 이 코스를 올라오는 동안 한 기의 탑이나 마애불을 만나지 못해 섭섭했는데 그것도 칠불암 부처님을 뵙는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한 세심한 연출이라고 믿고 싶어 졌다.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 통일신라, 남산 봉화골, 보물 199호
일러스트 아녕 그림 (삼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칠불암에서 바위산을 타고 올라가 만난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은 낭떠러지에 새겨져 구름에 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참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그동안 나는 신라 불상의 얼굴은 백제 불상에서 보는 두툼한 살집이 없고 턱선이 가파른 인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나의 생각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신선암에서 본 보살의 얼굴은 대갓집의 인심 후한 마나님을 떠올리고, 가난한 살림에도 늘 여유로왔던 친정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했다. 백제의 풍요와 신라의 정제 미가 만나 이런 복스런 마애불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통일신라의 풍요가 만든 얼굴, 내가 오랫동안 닮고 싶었던 얼굴이기도 하다.
남산이 불국토로 변하던 시기는 대강 8세기 중엽이라고 한다. 그 시기는 전쟁이 없고 내부로 집중할 수 있던 때다. 에밀레종과 석굴암, 불국사가 만들어지던 시기, 삼국유사에 ‘절들은 별처럼 흩어져 있고 탑들은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듯하다’고 말하던 시기다. 열 집 건너 하나씩 절이 있었다는 서라벌에는 17만 8963호가 살고 있었고, 초가집이 한 채도 없었다. 한 나라의 부와 화려함이 이처럼 한 도시에 집중된 예가 우리 역사에 또 있을까.
신라의 문화적 성취는 통일신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경제력이 높아진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전쟁이 없으면 군비가 노동력으로 옮겨져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있었을 것이고 백제 땅과 고구려 일부 땅에서 거두어지는 세금도 차곡차곡 쌓여 서라벌의 윤택을 도왔을 것이다. ‘남국 신라 북국 발해’라고 하듯 아쉬운 통일이었지만 서로 적국으로 살지는 않았으니 노동력이 군사로 동원되지 않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는 것만도 신라 백성의 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가 삶 위에 넘쳐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앞에서 본 칠불암
이번에 겨우 나는 골짜기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내가 본 경주 남산은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소였다. 남산의 무뚝뚝한 바위를 다듬어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어간 신라 도공들. 그들은 유한의 삶을 살고 갔지만 예술은 영원하여 천년의 숨결로 내게 온다. 그래서일까. 한 때 생명을 부여받아 찬란히 빛나던 것들이 시간의 그림자에 스며 서서히 마모되며 사라지는 것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순리의 시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