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가 만난 반가사유상

by 양경인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에 다가서는 순간 훅 끼치는 어떤 기운이 내 몸을 긴장시켰다.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몸에 밀착하여 어깨를 두르고 허리를 거쳐 내려가는 천의 자락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잠시 잊게 했다. 비단을 슬쩍 두르듯 다리에 휘감긴 옷자락도 무게감이 없었다.

뒷모습을 보니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누어 흐르듯 어깨로 늘어뜨리고 어깨에는 망토처럼 깃이 선 옷을 걸쳤다. 직선의 깃 끝은 살짝 구부러져 곡선의 유연함을 주었다.

머리에는 초승달과 달, 새의 날개, 전남 화순 운주사에서 보았던 항아리 모양의 탑 같은 것들로 된 보관을 올렸다. 이런 것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도 조금도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으로 몸을 휘감았지만 번잡하다는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고요했다고나 할까.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지극한 마음이 되어 불상의 주위를 탑돌이 하듯 돌았다. 밀려드는 관람객들이 없다면 조용히 무릎 꿇고 싶었다. 긴장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불상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을 때, 한 인생을 넘어서는 자의 고뇌를 보지는 못했다. 그저 고요하고 엄숙하고 숨 막히는 아름다움의 구현으로 있을 뿐. 하지만 이미 충분하였다. 청동을 얇게 펴고 무늬를 새기며 이 불상을 만든 이는 아마 영원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정조는 수원화성을 지을 때 못 하나, 벽돌 하나 가격까지 기록하게 했지만 건축물의 미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국고를 아끼지 않았다. “군사시설을 이렇게까지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신하의 말은 예산이 초과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때 정조는 말했다. 아름다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어지간한 시간이 흐른 뒤 맞은편 일본에서 온 ‘ 목조 반가사유상’으로 갔다. 이번에는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잘 생긴 얼굴이었다. 맞은편 ‘금동반가사유상’ 두 배의 크기인데도 귀여운 상투 묶음머리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상의는 옷을 걸치지 않아 말끔하였다. 불상이 커서 매끈하게 처리된 상반신이 거대하게 느껴질 법 한데 머리 뒤 불꽃 광배가 불상의 위엄을 조화롭게 받쳐주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 구현된 모습에 비해 하의의 굵은 주름은 조각도로 듬성듬성 파놓은 것 같아 옷자락 같지가 않았다. 정형화된 문양은 일본 목조불상에서 흔히 보는 일본 다움으로 가고 있었고 딱 봐도 일본 불상이었다. 석가모니가 정좌한 연꽃받침도 흔하게 보는 떡살무늬를 연상케 했을 만큼 평범했다. 옷자락 주름이 단조로운 편인데도 번잡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아쉬웠다. 우리나라 청동 반가사유상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불상의 압권은 얼굴에 있었다. 구주사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고답한 성인의 모습이라기보다 순둥이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나의 속되고 어줍은 고민을 쏟아내도 다 들어주실 것 같아, 마음 어느 갈피에선가 소리 없는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이렇게 시간이 걸렸네요......’


구주사 목조 반가사유상은 지금도 절에서 예불 때 쓰는 불상이라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그리 편안했을까.

우리나라 '금동 반가사유상'이 지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일본 나라 현에서 온 목조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살아가는 일이 다 비슷할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게 했다. 얼굴에 배인 너그러운 표정은 서산 마애삼존불의 가운데 부처님 미소처럼 편안하고 평화롭고 넉넉했으니까.

마주 보게 배치한 국보 78호와 일본 구주사 불상.


전시장에서 본 실제 크기는 앞에 보이는 일본 목조 반가사유상이 두 배 정도 컸다. 조선일보 사진기자(실명이 소개 안돼서 )가 찍었을 이 사진을 보면 우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행히 이 전시는 시간을 여유롭게 잡고 몇 번씩 가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불꽃 모양의 광배가 들어왔다. 불꽃 안에는 머리 위로 하나, 좌 우 세 개씩 일곱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선명한 인주 빛이었을 붉은색이 1300년 시간의 더께로 나뭇결에 스며 은은한 노을빛이 되어 있었다.

인터넷에서 빌려 온 구주사 목조 반가사유상.


이 사진은 아쉽게도 석가모니의 인자한 얼굴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대신 광배의 부조는 선명하였다.

어질고 수려한 얼굴도 잘 나타나 있다.

국보 78호, 83호의 금동반가사유상 (사진 강산해)


1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 78호, 83호 두 금동반가사유상을 마주 보게 배치한 전시가 있었다. 그때 나는 종교로도 예술품으로도 못 보고 어정쩡하게 머무르다 나왔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을 둔 엄마요, 직업인이요 , 대학원생이었다. 새벽에 대전에서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KTX에 몸을 싣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갈아타 강의실에 도착하면 항상 5분이 늦었다. 수업은 즐거웠으나 육아와 직업을 병행하며 시작한 공부라 몸이 고되고 분주하였다. 그런 상황이니 예술로 보기에는 눈이 부족하고, 부처님의 세계로 느긋이 들어가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시기였다.

일 년 후 일본 답사 갔을 때, 교토 광륭사에서 일본 국보 1호 목조 반가사유상을 만났다. 일본은 망해도 삼 년은 나무 팔아 버틴다고 할 만큼 나무가 많은 나라다. 재료가 풍부하니 정교함과 리얼리티가 뛰어난 목조불상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점만 있어도 국보급이 됨직한 목조불상들이 좁은 공간 안에 와글바글 모여 있었다. 한없는 자비로 중생들에게 도움의 손을 뻗치는 관세음보살상의 가슴께에서 뻗어나간 천수(千手)가 불가사리의 촉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물량에 멀미가 났는지도 모른다.


여러 불상들을 거쳐서 맨 나중에 이 ‘목조 반가사유상’ 앞으로 가도록 인도한 것은 전시의 의도적 배치였을까. 아니면 가이드의 센스였을 수도. 지금도 선연한 기억, 이 불상을 보는 순간 그 안의 수많은 불상들이 멀리 밀려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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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은 맨 몸에 하의만 살짝 걸쳐진 모습이다. 흔히 있는 젖가슴도 생략되어 극도로 단순하게 조각된 몸. 그 단순함이 나를 깊숙이 끌어당겼다.

등이 팽팽히 긴장되어 있고 손가락이 볼에 닿을 듯 말 듯한 자세. 석가모니는 정말 혼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은 종교보다 철학적 사유에 가까웠다. 비교가 외람되지만 내 삶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고대 인도 아소카 시대 조그만 왕국의 왕자인 석가모니가 출가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한 왕국의 왕이 될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1500년 넘게 동남아시아의 정신적 제왕이 되는 과정의 모습. 그런 상황을 광륭사의 반가사유상만큼 절절하게 구현한 불상은 처음이었고 그 후로도 본 적이 없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한 점의 불상만 머리에 가득 떠오르던 기억이 난다.

얼굴에 채 닿지 않은 손가락 (사진 부용당)


결을 살려 조각한 얼굴의 나무 문양은 신라 적송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 불상은 출처에서 여러 논란이 있지만 일본 국보임에는 변함이 없다. 세계의 대형 박물관이 약탈, 전리품으로 다수 채워져 있지만 빼앗긴 쪽에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면으로 보면 손가락이 얼굴에 닿아 있는 것 같지만 위 사진처럼 닿을락 말락 떨어져 있다. 그러니 몸이 얼마나 긴장된 상태이겠는가. 칼 야스퍼스는 " 인간의 떼가 묻지 않는 순수"라고 감탄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의 얘기로는 동경대 미술과 여학생이 밤에 몰래 들어가 이 반가사유상을 보다가 감동에 겨워 불상을 껴안았을 때 살짝 접힌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당황한 미술학도는 그 파편을 웅덩이에 버리고 달아났는데 나중에 파편을 찾아 분석했을 때 신라 적송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어느 정도의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본 미술학도의 마음을 이해한다. 광륭사 반가사유상과의 만남은 내가 일상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오롯이 감상에 전념할 수 있었던, 금싸라기 같은 시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을 전시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은 그런 경험들이 한몫했다. 그때는 그토록 시간에 쫓긴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건강이 발목을 잡아당겨 차일피일 미루다가, 일본에서 어렵게 모셔온 '주구사 목조 반가사유상'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보랴 싶은 생각으로 갔던 것이다.

국보 78호가 지극한 미의 세계로 나를 데려갔다면 일본의 구주사의 반가사유상은 사람살이의 곡절이 비슷할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이 전시를 보며 내 삶이 예술과 생활의 긴장속에 아슬아슬한 시간들을 지나왔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강산해)

작년 봄, 뉴질랜드로 떠나는 작은 딸이 짐을 싸다가 급한 외출을 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애인이라도 있었나, 딸이 스물여섯이면 바랄 수 있는 엄마의 호기심을 살짝 감추고.


“ 국립박물관 다녀왔어. 한국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게 있어서”

“ 그게 뭔데? ”

“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 어땠어?”

“ 나를 비웃는 것 같더라”

“ 그래?”

“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 내 고민이 별거 아니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


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신나고 즐겁게 출국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미지의 세계에서 독립된 삶을 시작해야 하는 내밀한 불안이 있었나 보다.

국보 83호 뒷면 (사진 강산해)

우리나라 국보 78호,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광륭사, 구주사의 ‘목조 반가사유상’ 은 세계 4대 반가사유상으로 꼽힌다. 12년에 걸쳐 세계 4대 반가사유상을 모두 볼 수 있었으니,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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