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람들 8
산봉우리처럼 굽은 등. 풋거름 뿌리느라 손 주름 사이사이에 남아있는 흙. 닳아서 은빛 도는 검정 고무신. 할아버지 하면 으레 떠오르는 모습이다. 장난기는 어찌나 많으시던지. 군입정 좋아하는 손주들이 달고 짠 간식을 사달라 조르기라도 하면 갓 잡아서 뜨끈하다며 채로 잡은 파리를 내미셨다. 사체를 보며 놀란 고라니 마냥 꽁무니 빼는 걸 보시고 낄낄대시는 분이었다. 그와 별개로 바닥에 대자로 누워 온종일 핀둥거리는 손주들에게 버럭버럭하시는 게 제법 무서웠다. 나는 걔 중에 제일 어리니 몸이 자그마해서 굴러다니는 공쯤으로 여기신 듯하다. 사촌들 발에 채니까 저쪽 가서 있어라. 손으로 몇 번 옮기기만 하시고 별말 하지 않으셨다.
어릴 때 입이 짧아 밥을 끝까지 먹는 법이 없었다. 시골 가면 더했다. 음식이 받지 않아 자꾸 메슥거려 눈치를 보며 뱉기 일쑤였다. 그날도 뭐라도 사서 멕여야 한다며 구멍가게까지 간 할머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을 거셨다.
“넌 밥 왜 안 먹니.”
“속이 안 좋아요.”
아. 저 장난기로 번득이는 눈빛.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또 범상치 않은 장난을 하시나 보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대뜸 옆에 자개로 만든 장을 툭툭 치시더니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장에 뭐 있는 줄 아니? 곰쥐 있지. 밥 안 먹는 애 잡으러 오지.”
“...”
... 그 당시 시골 분들은 망태 할아범으로 겁을 줬는데 희한하게 외가댁이 있는 마을에선 곰쥐였다. 곰만 한 쥐. 곰쥐.
“할아버지. 무서워요. 열지 마세요.”
할아버지 팔을 단단히 동여매는데 손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시곤 아주 대차게 여셨다. 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외치며 일주일 분의 눈물을 빼려고 준비하는데. 곰쥐는 없고 그냥 해묵어 보이는 옷만 걸려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곰쥐가 안 나오네. 그러시며 옷 밑에 손을 쑥 집어넣어 통 하나를 꺼내셨다. ‘사랑방 사탕’ 그 초록색 통 안엔 갖가지 사탕들로 가득했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혀를 시퍼렇게, 빨갛게 물들이는 사탕만 먹어왔는데 할아버지의 사탕은 그렇지 않았다. 입안을 화하게 만드는 사탕. (아마도 박하) 땅콩 맛 나는 사탕이 있었던 것 같다.
포장지를 벗겨 입에 넣고 우물대는 걸 보시면서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셨다.
“언니랑 노나 먹지 말고 너 혼자 먹는 거야.”
노나 먹으라는 뜻으로 손에 한 움큼 집어주신 것 이제야 알겠다. 언니 입으로 몇 개 들어가는 걸 보며 아무 말 하지 않으셨으니까.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투병 중이셨던 할아버지는 한동안 우리 집에 올라와 계셨다. 올라오신 날부터 쭉, 우리 집의 아침은 할아버지의 가래침 뱉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후두 쪽이 좋지 않아 가래침이 들끓는다고 했다. 답답하시니 연신 세면대를 붙잡고 가래를 토해내셨다. 할아버지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그분의 농담과 이야기를 사랑했지만, 그건 듣기가 좀 힘들었다. 가끔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곤 했다. 더 먹지 그래, 엄마가 내 눈치를 보며 붙잡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학교 가는 길에 삼각김밥 포장을 급하게 벗기며 삼키는데 김밥도 아닌, 죄송함이 속에 턱 얹혔다. 용돈을 털어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순대를 사 갔다. 유행하던 원더걸스 노래를 철부지처럼 흥얼거리며 접시에 덜어드리면 할아버지는 웃으셨다. 그럼, 죄책감이 아주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소천하셨을 땐 그리움과 자책감으로 마음이 저릿했다. 장난치시는 할아버지. 농담하시는 할아버지. 밥 먹지 않는 손녀가 뭐 예쁘다고 입에 사탕을 물려주셨는지. 우리 집에 계셨을 때 열쇠를 갖고 나가지 않아 복도 밖에 난 창문에서 할아버지께 열어달라 부탁한 기억. 도시의 대문은 시골의 것과 달라 한참 헤매셨고 결국 연장으로 문고리를 반쯤 부수셨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다가도 열쇠장이를 불러 문을 땄을 때 바깥에서 기다린 손녀에 대한 걱정, 도시 생활에 혼란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마주한 게 함께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 드릴걸. 감사해할걸. 시골서는 유쾌하게 구석구석 돌아다니셨는데 파동 없이 누워 무표정으로 TV를 보셨다. 손잡고 근처 시장에라도 구경 갈걸. 그리고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그게 뭐라고. 그게 뭐 어쨌다고. 나는 못됐고, 바보였다. 이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고 은혜도 모르는 바보 자식. 바보라서 후회만 하며 질질 짰다.
산봉우리처럼 굽은 등. 풋거름 뿌리느라 손 주름 사이사이에 남아있는 흙. 닳아서 은빛 도는 검정 고무신. 그리고 땅콩 맛 사탕. 그 사탕 맛이 내 마음에 단단히 스며들어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입 안까지 맴도는 듯하다.
정작 나는 사탕같이 다디달고 고소한 기억을 안겨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지만, 간간이 투병하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그분이 기뻐하실만한 걸 척척 해내는 나를 상상하곤 한다. 상상 속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짓고 계시는데 웃고 계셔서 더 미어진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