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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순재 Mar 08. 2019

재능과 파격일탈은 한 통속, 두 편의 영화, 진한 감동

보헤미안랩소디와 'The Boy, Erased'


이번 3월 초에 업무차 토론토를 가게 되었습니다.  해외 출장길이 늘 그렇듯 여행을 통해 가고 오는 비행기 속에서 새로운 최신 영화를 만난다는 설레임은 긴 비행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줍니다. 영화 목록을 뒤적이다가

만나게 된 두 편의 영화는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뇌의 부름과 향함은, 그것이 범인들이 갖지 못하는 재능일 경우에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낭중지추하며, 그러면서 파격과 일탈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재능이란 그저 남들보다 뛰어나고 우수해서 주목을 받는 것도 있겠지만, 파격적이고 일탈적 측면도 함께 공존하기에 더욱 눈길을 끄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내 직업이 '발달장애' '자폐증' 전문가이다보니, 이런 특별한 상황에 대한 스토리나 영화를 보면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는데요, 물론 자폐친구들은 재능보다는 파격과 일탈의 측면만이 너무 크다보니, 문제행동으로 더 주목을 받곤 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이 점을 잘 헤아리고 잘 만 거둔다면 자폐아이들에게도 평범한 평범한 일반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특별한 면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번에 만났던 영화는 대부분 사람들이 보았던 '보헤미안 렙소디' 그리고 대부분 듣도 보도 못한 영화, 'The Boy, Erased'입니다.  'The Boy, Erased'는 한국에 개봉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영화인 듯 한데요, 참으로 잘 만들어진 '특수한 상황'에 대한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매듭짓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런 점에서 종국적으로 손에 얻을 수 있는 답이 없는 우리네 상황에서 비슷한 자괴감 내지 동질감, 혹은 막연함 등을 함께 제시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보헤미안 렙소디는 록그룹 퀸과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큘리에 관한 속도빠른 일대기입니다.  프레디와 같이 독특한 외모와 행동, 그럼에도 엄청난 성량과 음악적 재능을 그대로 연기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텐데 그래도 비슷하게 상당히 맞추어져 있습니다. 천부적 음악적 재능은 작곡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성량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재능만큼이나 독특한 패션과 성적 취향 등이 독특한 그의 뇌를 나타내 줍니다.  록을 오페라화하고, 온갖 독특한 음악적 소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실험연주와 무대들의 재현, 퀸의 시대가 1970년대가 아니고 지금이었다면 또 다른 역사가 써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아직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그 시대에도 이런 앞서가는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실제 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도 분명히 있었기도 하겠지만, 그점에서만도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제도와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그를 재능을 꺾으려 할 때마다 그는 과감히 밀어부치고 그리고 열정으로 그것을 완성해 갑니다.  그렇게 록음악에서 하나의 획을 그을 정도의 재능과 열정이었지만, 그의 독특한 뇌적 구조는 그를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중단하기 어려운 그의 성적 정체성은 결국 그를 산화시킵니다.


가장 사랑한 사람도, 진정으로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어했던 사람도 그의 성적 정체성때문에 곁에 둘 수 없었음은 그를 지극히 외롭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재능, 그것으로 인한 화려한 삶의 전개, 그로 인한 퇴폐와 퇴락의 길...  그의 유전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유전자라는 놈은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서 어찌보면 우리는 유전자에게 몸을 빌려준 셈이 됩니다. 유전자들은 결국 자신을 다 드러내고야 말죠...  그것이 재능이 되었던 성적 정체성이 되었던...  우습게도 모성애 유전자는 부계유전인 반면, 동성애 유전자는 모계유전입니다. 왜 모계는 동성애 유전자를 발전시켰을까요?  양육의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었을까요? 자신에게 유전자를 준 수컷은 자신을 쉽게 떠나는 반면 동성애 유전자는 자신의 새끼가 아닌 공동의 양육을 해준다는 의미에서 소멸되지 않고 발달해 왔다고 하네요...  

동성애 성향을 보여주는 유전자는 성염색체 위에 존재합니다.  Xq28로 명칭됩니다.


'The Boy, Erased'라는 멋진 영화 역시 아무 일 없을 것 같이 지적이고 안정적이며, 화목한 목사의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성장한 아들이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상 아들의 성정체성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해서도 안되는 (아마도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합니다) 죄악으로 여길 수 밖에 없기에, 이를 수정하고자 'Love in Action'이란 성정체성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치료하는 일종의 훈련장으로 아들을 입소시켜 버립니다.  영화는 이 훈련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유전적으로 아우성치는 이런 선천적인 문제를 세뇌와 행동교정, 압박,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한 죄의식에의 고취 등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것들이 통하지 않으면 폭력까지도 불사하는 훈련과정...  그런 훈련을 통해 자신을 바꿔보려는 아들은 결국 자신의 유전자의 아우성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인하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그 곳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아내, 아들의 엄마는 아들을 알고 아들을 인정하고, 그리고 아들의 유전자를 아주 차분히 인정합니다.  훈련소에서 아들을 빼내어 가면서 소리치는 장면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던 그들을 향해 "Shame on You! 부끄러운 줄 알라' 하면서 동시에 'Shame on Me!'라고 말합니다.  엄마로써 아들에 대한 사죄이기도 합니다...  목사아내 (사모)로써의 일들도 등한시 하자, 아들은 혹시 자신으로 인해 부모의 사이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하지만, 엄마는 말합니다.  'I love God' 'God loves me' and 'I love my son'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아들은 성적소수자를 위한 컬럼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끝까지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빠와의 거리는 멀어지고 있지만, 이 대목에서 지극히 서로를 사랑했던 가족간의 갈등요소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지만 인정하기 싫거나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꽤 많이 있으니까요...


젊은 날에 멋진 외모와 연기실력으로 많은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던 목사역의 러셀 크로우 (제가 제일 좋아했던 배우였습니다)의 중년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목사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안으로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 저음이고 묽직한 목소리들, 그리고 방관자같으면서 따뜻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 그런 눈빛에서 과거와 현재의 러셀 크로우 모습이 교차합니다.  엄마역의 니콜 키드만 역시 이제는 이런 역이 더욱 어울릴 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잘 한 연기들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더욱 극성맞아지는 자폐유전자, 혹은 자폐유발 유전자들의 결합...  복제변이들...  이 속에서 부모된 우리는 방황합니다.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이 문제를 놓고,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할 것을 요구당하고 또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오해받고, 편견에 시달려야 하고, 숨어야 하고, 그렇게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 속에서 열등의 소수자로 여겨지거나, 파격 일탈을 해야만 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다양한 영역에서 그나마 무엇이 나을까요?  무엇이 더 낫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소재는 다르지만, 우리네 사정과 다르지 않은 이런 영화는 또 조용히 우리의 갈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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