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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Oct 03. 2024

18화 완결: 시간을 넘은 선물

기억을 보는 자

서현은 무겁고 답답한 기운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고, 처음에는 주위의 소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기계가 내는 삐—삐— 소리, 산소마스크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의료 장비의 신호음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딘가 아득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서현은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중환자실이었다. 그녀는 심전도 체크기에 연결된 채, 여러 가지 의료 장비가 붙어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통해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고,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러나 그 고요하고 어둡던 영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생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였다. 엄마는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초췌한 얼굴, 늘 곧게 서 있던 등이 조금 구부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엄마는 그녀가 이곳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순간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서현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녀렸던 엄마는 그동안 남편과 아이들을 홀로 돌보며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견뎌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던 엄마, 아빠의 죽음 이후에도 두 딸을 키우며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어온 엄마였다. 그리고 그동안 서현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영의 세계에서 아빠와 지연을 만났던 기억 속에서 엄마는 그리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배경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현의 눈앞에 앉아 있는 엄마는 한순간도 서현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엄마는 홀로 그 시간을 견뎌왔던 것이다.


서현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마스크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엄마가 놀라며 서현을 바라보았다.


"서현아…"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떨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도 깊고 강했다.


"엄마…"


서현은 마음속으로만 속삭였다. 아직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엄마의 눈빛에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서현을 기다렸는지, 얼마나 그녀를 위해 애써왔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서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깨달았다. 오늘의 소중함을,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을. 그녀가 돌아온 이 생의 세계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영의 세계에서의 여정은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되찾아주었고, 자신이 그동안 간과했던 것들—가족, 사랑, 일상의 작은 행복—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만들었다.


서현은 엄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빠와 언니를 잃은 슬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상실감도 이제는 그녀를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랑과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현은 갑자기 엄마의 과거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처럼, 엄마가 아빠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서현과 지연을 품에 안았던 첫 순간들, 그리고 아빠의 죽음 이후에도 혼자서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이 생생하게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엄마의 과거와 미래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엄마가 견뎌온 모든 고통,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더 누릴 행복까지. 서현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영의 세계에서 자신이 과거를 돌아본 경험 덕분일까, 이제 서현은 생의 세계에 돌아온 후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 순간, 서현은 이 능력이 단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 능력은 단순히 타인의 삶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가 어떻게 사람들을 성장시키는지,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이 어떻게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서현은 이제 자신이 왜 영의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 능력은 그녀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였다.


서현은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나는 돌아왔어. 그리고 내가 할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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