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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윤 변호사 Jun 28. 2023

퇴사의 단 한 가지 장점

회사 과몰입러가 자진해서 백수가 된 사연

퇴사한 지 딱 두 달이 지났다. 퇴사의 이유는 너무나도 많지만 그 이유보다 중요한 건, 내가 먼저 포기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일을 사랑하기를 넘어서서 일과 나를 동일시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런 시대에(?) 팀원을 뽑을 때도 "워라밸이 중요하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일에 몰입하는 사람만이 얻는 본연의 기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워라밸이나 일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냐"는 질문을 서슴없이 하는 팀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고보니 성인이 된 이후, 한 번도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국영수 과외 선생과 드럭스토어 아르바이트생을 병행하며 학교를 다녔다. 사법시험공부를 할 때는 근로장학생이라는 이름의 강의 자료 복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로펌 특성상 주 6일 출근은 일반적이었고 괴롭긴 했지만 묵묵히 4년을 다녔다. 스타트업에 들어와서도 영역 구분 없는 1인 role을 맡아 또 쉼 없이 일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이 즐거웠다.


사실 일이 괴로운 적은 별로 없었다. 일은, 적지 않은 돈도 주었고 그럴싸한 명함도 주었고 심지어 즐거움과 쾌감까지 선사했다.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둘러싼 사람과 환경이 주는 불쾌감과 지금 쉬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반복될 때만 비로소 퇴사를 결심했을 뿐이다. (그래봤자 10년 경력에 퇴사는 단 두 번 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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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의 장점은 끝이 없다. 퇴사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퇴사 이유, 퇴사 후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들을 올린다. 물론 나도 그렇다. 인간은 본래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퇴사는 기쁠 수 밖에 없어! 


하지만 나의 이번 퇴사는 조금 다르다. 나는 퇴사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단 퇴사가 아니면 도저히 뭘 어쩔 수가 없어서" 퇴사를 했다. 아무 것도 정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왜냐고? 

2023년의 나에겐 원래 없던 '자식'이 생겼다.

2023년의 나에겐 만 2살짜리 딸이 있다.

그리고 이건 나의 퇴사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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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라면 응당 "하 오늘 날씨도 좋은데 퇴사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회사에 다닌다. 하지만 막상 퇴사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의 밥벌이도 문제이거니와, 준비되지 않은 명함 없는 삶은 생각보다 추레하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며 다양한 연사 섭외, 회의 참석 제안 등이 있었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회사에게 오는 요청이다. 내가 쌓은 커리어, 내가 쌓은 체계, 내가 쌓은 네트워크, 나에게 오는 다양한 기회와 정보들... 분명 내가 쌓은 것 같지만 그 회사에 다니는 나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회사의 이름이 내 이름인 것처럼 착각하고, 회사의 능력으로 내가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무구한 주니어가 아니다. 잔인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대부분의 근로자는 모두 대체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뭐가 있다고? 나에겐 자식이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주제에 자식 탓을 하고 싶진 않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하고 싶기도 하다.

(이런 엄마라서 미안해 그치만 어쩔 수 없는 걸!)


하필 내 일을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이 무척이나 시끄러울 때, 내 자식까지 시끄러웠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3주 동안 등원 길에 드러눕고, 엄마가 없다고 엄마 보여달라고 저녁 5시부터 끊임없이 울리는 영상통화... 어린이집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할퀴고 오고, 하원 후 봐주는 할머니도 할퀴고 때리고... 한두 달간 매일매일 고뇌의 연속이었다. 회사 일은 많고, 사람은 없고, 대체자도 안주는데 휴가를 내기도 애매한 상황들. 내가 이 시기를 몇 달을 견뎌야 할까? 아니, 견딜 수는 있을까?


그리고 결정했다. 일단, 엄마라는 역할을 은퇴하는 건 반인륜적 행위이므로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회사 생활을 은퇴한다. (?)


나는 전 회사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팀 매니징도 즐거웠고, 업무도 즐거웠고, 외부 회의나 행사에 참여하는 일도 적성에 맞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회사에서, 아니 몇 년 뒤엔 이곳의 성장을 잘 도운 뒤 또 다른 작은 스타트업에 가서 천년만년 일하고 싶었다. 근데 뭐 어떡하겠어.. 내 딸의 성장부터 좀 도와야겠는데!!


-


그리고 다시.

퇴사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아직도 가끔 일이 그립고, 명함을 건네주며 하는 인사들도 그립고. 회사가 주는 월급과 복지와, 화도 내고 또 웃기도 하고 싸웠다가 술 마시며 내 맘 알지~ 하는 시시콜콜한 일상이 주는 리듬이 그립지만.


"엄마! 오늘은~ 아가가~ (어린이집) 쪼~꼼 느께 가고시퍼"라고 말하는 만 두 살짜리 딸에게 "빨리 옷 입어! 너 이런 식으로 하면 엄마 회사 못 다녀!!!"라고 화내지 않고 "쪼~꼼? 그럼 진짜 쪼~꼼만 쉬다가 가야 돼~? 갈 때 엄마랑 요구르트 먹으면서 가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퇴사의 단 한 가지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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