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과몰입러가 자진해서 백수가 된 사연
원래도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책을 더 자주 읽게 된다. 주변의 워킹맘들도 마찬가지. 다들 정신이 없을 텐데 무슨 짬으로 책을 읽는 걸까? 육아를 하면 대부분 독서를 하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독서는 가장 접근성이 좋은 취미이다. 아기가 잠깐 쪽잠을 잘 때, 어디론가 이동하거나 외출하지 않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 기구나 장비가 필요 없고 얇은 책 한 권, 스마트폰이나 이북리더기만 있으면 충분한 것. 낮이고 밤이고 아무 때나 가능한 것. 게다가 육아를 하다 보면 곤두박질치는 자기 효능감과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 쓰다 보니 육아와 병행하기에 최적의 취미생활이다.
퇴사의 표면상 이유는 육아가 아니었지만 - 그리고 이면의 이유를 보더라도 '육아를 하기 위한 퇴사'는 아니므로 퇴사의 이유는 육아가 아닌 게 맞는 듯 - 퇴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육아 비스무레한 것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되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아이가 잠든 밤에 다시 나와서 일/독서를 한다는 것"이었다.
밤의 모퉁이에 도달해서야 아무도 잠들지 않은 작은 방에 홀로 남아 겨우 시를 쓰기 시작하는 나는 당신에게 오로지 쓰기 위해서만 깨어 있는 이기적인 ‘나‘일 뿐이었다. -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중
그러니까 내가 엄마 작가로서 육아와 집필을 병행하는 것이 힘에 부쳐 소설을 못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김미월이라는 인간 자체가 원래 게을러서, 체력이 형편없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해서, 근성이 없어서 이 모양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엄마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중
속도감을 즐기게 된 아이는 친구들 없이도 신나게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다. 일을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에코백 안에 책과 작은 노트를 악착같이 챙겨 다녔다. 아이를 위한 물건들 사이에서 책의 모서리는 둥글게 휘어졌고 노트의 표면에는 잔 기스가 잔뜩 생겼다. -돌봄과 작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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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멋진 여성들인데 근데 이 현실이 왜 이리도 슬픈 건지. 왜 밤에 일해야 되냔 말이야. 낮에도 일(육아)하고 밤에도 일하면 수명 줄어든다고~! 밤에 책 읽으면 시력도 나빠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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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을 육아(및 살림)에 할애하는 엄마들은 '밤의 모퉁이'에 도달해서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유치원을 다녀와도 하원은 오후 3시-오후 4시. 그때부터 엄마라는 존재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반짝거리지만 동시에 '하 나 진짜 디질 것 같다'는 생각이 끝없이 교차하는 육아 현장 속에서, 현대 사회와 연결되어 있지만 분명히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다가 아기가 잠들고 난 오후 9시, 10시가 돼서야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발을 꺼내고 현대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다! 뿅!
간간이 확인은 했지만 정확한 내용은 읽을 수 없었던 각종 연락(이메일,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 등)을 읽고 난 뒤 남들처럼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지만 있는 힘껏(?) 리액션을 한 뒤 널브러져 있는 집안일을 남편에게 시키고 물 한 잔 마시며 책상이나 식탁에 터덜터덜 앉는다. 오늘 하루의 남은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남짓이다. 이 두 시간을 나에게 써보겠다고 기를 쓰고 책도 읽고 글도 써 본다.
그러다가 현타가 온다.
아씨... 나 뭐 돼?
나 뭐 되는 거라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야?
나 뭐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어????
퇴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낮에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커피 한 잔 내리고 자리에 앉아 일도 하고 텍스트도 읽고. 아니 조금 더 예전에 애기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나도 낮에 일도 하고 저녁에 취미 생활도 하는 사람이었다! 회사 퇴근하면 저녁에 필라테스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공부도 하고 주말엔 여행도 가고 테니스도 치고... 내가 만든 주제에 탓하는 건 저얼~대 아니고 그냥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얘기다.
며칠 전 퇴사한 회사에 미팅을 할 일이 있어 방문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와 함께 '오전에' '어른의 말'을 '어른의 옷'을 입고 하고 있으려니 얼마나 신이 나던지. 미팅하면서 쓰는 노트북의 글자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녔고, 타자를 치는 내 손은 춤을 추고 있었던 것 같다. 아, 낮에 일하는 건 이렇게 좋은 거구나. 밤에 모니터를 볼 땐 눈이 침침했는데 낮엔 눈이 침침하지 않구나! 낮에 일할 땐 밤에 마시는 카페인 걱정을 안 하고 마음껏 커피를 마셔도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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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러지 못해서일까? 요즘따라 내 주변의 엄마들이 적법한 육아휴직 외에는 일을 절대 놓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더욱 커진다. 퇴사 후 글을 쓰거나 피드를 올릴 때에도 '애를 키우기 위해 회사를 퇴사한 것'처럼 보이거나 이 생활이 여유로워 보이지 않기를, 티 없이 즐거운 것처럼(물론 애초에 육아가 그렇게까지 즐거울 수도 없다) 보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올린다.
육아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나는 내 주변의 나의 선배, 동료, 후배 엄마들이 끝까지 '낮에 일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순간엔 포기할 수도 있다. 그 순간은 아기가 신생아 때일 수도 있고, 만 두 살이 되었을 때일 수도, 초등학교 1학년일 수도, 중학교 3학년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주변과 타협하고, 싸우고, 버텨서 '낮에 일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며칠 전 친한 언니와 밥을 먹고 있을 때 언니가 물었다. 엄마로 사는 건 어떤 거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로 산다는 건 말야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 불을 건너는 거야.’ 말해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천국은 내 두 팔 안에 있다. 그러나 발아래엔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다. 나는 무서워진다. 혹시라도 놓치면 다 타버릴 테니까.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끝은 언제야? -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중
천국을 등에 업고 지옥 불을 건너더라도, 밤 말고 낮에 건너는 게 조금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
낮에 건너고 있어야, 녹아내리는 나를 발견해 줄 사람도 더 많을 테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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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오늘까지 마감인 토론회 발제문을,
하원 후 각종 놀이와 밥 먹이기 씻기기 재우기 노동을 한 뒤
오늘 밤 두 시간 남짓 앉아서 써야 하는 운명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