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MZ세대 어쩌구 이제 그만
유튜브에 먹이를 주지 않아야 했다. MZ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다루는 영상 하나에 좋아요를 눌러준 뒤로 피드에 간간히 MZ세대를 개탄하는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구의 30퍼센트나 차지하는 밀레니얼과 Z세대는 너무나 신세대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일터에서 갈등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종족들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새로운지, 관리자는 적응이 힘들다 대충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적어도 내 피드는 그렇다)
영상을 보다 보면 MZ세대란 '요즘 것들'이라고 칭하면 꼰대 소리 들으니까 해당 호칭을 조금 더 교양 있게 영어로 바꾼 호칭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변화가 개탄스러운데, 사람 대신 '것'을 칭함으로써 원래 비하의 의미가 내재되어있던 '요즘 것들' 대신 중립적으로 받아들여지는 MZ를 택함으로써 그대로 교양 있는 척을 하면서 비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회적 지형을 곰곰이 살피지 않고 세대 문제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풍경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물이 나온다.
나는 노동권 문제를 세대차이라는 어스름한 말로 바꾸는 이 현상이 너무나 불편하다. 쉽게 이직 혹은 퇴사하고,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회식을 좋아하지 않고, 퇴근 후 연락을 꺼린다는 MZ세대의 문제는 세대갈등이라고 지시되지만 사실은 노동권 문제다.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시간을 얼마나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고, 한 개인에게 부과되는 적절한 노동 시간과 강도가 얼마인지의 문제다. 그런데 이것을 'MZ세대... 이래도 괜찮은가?' 식의 시각으로 포장한다.
노동권 문제를 세대 문제로 포장해서야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피고용인이 되는 데에 나이 제한이 없음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MZ타령의 결과로는 기분이 나빠진 MZ 세대와 역시 기분이 나빠진 기성세대만이 남을 뿐이다.
물론 MZ세대가 진심으로 개탄스럽고, 그들과 거리감을 느끼는 기성세대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전통적으로 요즘 것들은 개판이었다. MZ세대 이전에는 서태지나 듣고 힙합 따위나 좋아하는 X세대가 있었다. 요즘 것들을 드러내는 기호 또한 꾸준히 변화해왔는데, 장발에 통기타, 미니스커트, 모단걸과 모단 보이 등 앞으로 쭉쭉 내려가려면 계속 내려가진다. 아마 인류가 언어를 쓰기 시작한 그 시점까지 내려가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에도 요즘 것들은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는 정치학 강의를 듣기에 적절하지 않다. 우리 논의는 인생의 여러 행위에서 시작되고 그런 행위들과 관련 있는데, 젊은이는 그런 행위들에 경험이 거의 없다. 또한 젊은이는 감정에 이끌리기 쉬워 정치학을 공부한다 해도 별 소용이 없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문구는 최신 유행이나 대중의 취향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나는 개탄스러운 요즘 것들이란 실존하는 인간상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믿는다. 항상 존재했던 입버릇이고, 변화가 만드는 당연할 갈등이다.
나는 가끔 기성세대의 지나친 감정을 본다. 진지하게 인정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지는 감정, 욕구, 트라우마가 가끔은 너무 선명해서 가끔은 올바른 대답 방법을 모르겠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본인의 감정적 욕구를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그들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여느 인간처럼 있지만 그것을 건전하게 푸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은근하게, 혹은 수동공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내어주기를 원했다. 한편으로는 요즘 것들을 깎아내리면서 자존감을 잘못된 방식으로 채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원래 사적인 관계에서 해소하는 것이 맞다.
한국은 거대한 트라우마 덩어리와 비슷하다. 모두가 해결하지 못한 시대적 트라우마가 있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인간은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선택하곤 하며, 감정을 억누른 무게가 나중의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한국인은 불쌍한 종족이다. 그러니 더 나은 노동환경을 원하는 자들을 볼 때 자신은 그들보다 더 고생했다는 감정적인 이유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신의 짐을 지고 살아가며, 한때 약자였던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약자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