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한 건축가들은 대답하기 부끄런 질문을 내게 던진다. 문화예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노동자인, 다가가는 곳마다 '건축과 나와서 여기서 뭐 하냐는' 질문을 듣는 내가 커피잔 건너편에 있지만 질문하는 건축가는 이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기세다. 내가 가는 한 두 개의 자리에서 건축가를 만난 나는 발표한 글도 없으면서 건축계의 글쓰는 사람 대표마냥 질문받고, 확신할 수 없는 판단을 오만을 실어 내뱉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선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쪽팔려한다. 뭐가 그리 답답한지 물어보려 하는 갓 독립한 건축가들. 대화는 보통 담론 없음을 답답해하면서 글 쓰는 사람들이 건축계에 더 많아져야 함을 상기하며 끝난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재직 중인 문화기관에선 '건축과 나온 유명한 분들'의 소식이 가쉽처럼 돈다.
이 풍경이 동시대 건축계를 너무나 잘 포착하는 것 같아 나는 그냥 웃긴다. 지난 10여년간 한국 건축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사람들은 건축이 멋있다고 생각하고 건축을 궁금해한다. 적어도 문화예술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과 기획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들은 건축가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잘 모르겠다. 질문하는 건축가들과 나의 외로움에 비추어보았을 때 확실히 서로가 못 만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 세대이자 막무가내의 기획자인 나는 제법 열심히 건축 연구를 하는 건축과에서 공부한 '건축 성골'인데 사실 지인 중 다른 학제 연구자와 작가들이 훨씬 더 많다. 아는 건축 연구자도 연구실 동문들 몇 말고는 없고, 그들 중 건축가와 연구자로서 관계맺는 법을 아는 자는 더 없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술계 사람들의 관계를 나는 내심 부러워했다. 그들은 친구가 많아 보였고 친구들과 작품 얘길 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했던 나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로부터, 건축가들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낀다. 발제와 세미나로 어쨌든 계속 읽는데 이렇게 모른다니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젊은 건축가의 불안과 시작하는 연구자의 불안은 공명한다. 비평문, 담화 그 어떤 형태건 언어는 파들거리는 현상을 잠깐 잡아버리는 힘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을 여과할 수 있게 한다. 친구의 작업에 대해 짧은 글을 써 주면서, 그리고 내 작업의 평을 들으며 나는 글의 회복적 가치를 믿게 되었다. 글은 작업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타인의 작업 이야기를 넓게 듣고, 대화하면서 그 작업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에도 의미가 충만하지만, 대화한 내용을 글자로 굳혀버렸을 때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정신 건강이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진지한 글을 하나씩 받아봐야한다고 믿게 됐다. 추켜세워주거나 비난하는 그런 글 말고, 이 사람이 어떤 관계 속에서 작업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물은 어떤 관계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해주고 잘 살펴주는 글을.
지적인 허영이 있던 학부 친구들은 한창 전에 한둘씩 설계하러 떠나버렸다. 나는 홀로 남아 허영을 동력으로 삼았다. 근무 중이 아닐 때에는 벌여놓은 연구를 파고들고 건축계 사람들을 만나면서 건축인 자격을 갱신하지만 낙오된다는 불안이 크다. 내 세대는 출판, 전시, 아카이브의 세례를 받았고 그것이 부풀린 기대로 분명 설계 말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자들이 우리 연구실 동기들 맡고도 있을 것이다. 담론 없음은 건축가들에게나 글쓰는 자들에게나 좋지 않고 이 부재는 불안의 맛난 먹잇감이 되면서 상황을 실제 나빠질 가능성보다 더 나쁘게 판단할 가능성을 키운다. 그러니 빨리 동료를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