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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Apr 06. 2024

엄마의 복주머니

아들아 쪼~~옴

문여사는 길쌈을 하던 시대를 산  사람이다.


한복을 만들어 입던 시대를 거쳐, 몸빼를 만들었고, 겨울이면 털실로 뜨개질을 해서 애들 옷을 만들어 입혔다. 아흔을 눈앞에도 두고 있는 지금도 철이 바뀌면 옷감을 새로 준비하고 재봉틀 앞에 앉아 뭐든 만들고 계시지만 옷을 만드는 일은 힘에 부치는 일이라 몇 해 전부터는 옷 대신에 간단한 소품을 주로 만드신다.


여름이 올 때쯤이면 중앙시장 옷감 가게에서 풍기인견을 몇 마씩 끊어 오신다. 고무줄도 몇 줄을 사서 고무줄 탱탱하게 넣은 여름 꽃무늬 파자마를 만들어 딸들, 며느리한테 안겨 주신다.

호리 한 딸한테는 낙낙하니 좋지만 좀 덩치가 있는 딸은 살짝 끼이고, 아주 작은 며느리에게는 길고 크다.

그건 그네들의 사정이고 비슷비슷한 사이즈로 몇 개씩을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입는 사람이 옷에 맞춰 몸을 조절해야 한다.



 런 문여사님에게 필생의 업이 하나 생겼으니 환갑 맞는 자식과 조카들에게 붉은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육만 천 원(61살을 살았다는 증표라나?)을 넣어 허리춤에 달아주시는 거다. 그 시작은 당신의 친정조카(질녀)의 환갑이었고, 사위가 두 번째, 큰딸, 그리고 친정의 조카들과 둘째 딸 까지를 지나 올해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의 환갑년이 되었다.     


 오빠의 환갑 날 달아주셔야 할지, 새해 덕담으로 줘야 할지를 고민하시던 엄마는 생일은 할지 안 할지 모르니 새해가 좋겠다며 지난해 가을부터 맘이 분주했었다. 봉투에 넣어줄 어마어마(?)한 용돈을 신권으로 준비하시고, 복 주머니에 넣어줄 육만 천 원도 신권으로 준비하느라 당신께서 드나드시는 우체국엘 몇 번을 다녀오셨다.


중앙시장 비단을 파는 포목점에 가서 빛깔 좋은 붉은 비단천을 끊어 와 재봉틀을 돌려 당신의 최선의 정성과 사랑을 넣어 주머니를 만드셨다.

그 복주머니는 찾아오는 엄마 친구들에게 자랑이 되었고, 가끔 들리는 나를 잡고 당신의 맘과 이벤트 계획을 미리 알려주셨다.


그 옛날 외할머니께서 큰 외삼촌의 환갑날 그 붉은 주머니를 허리에 둘러 주시면서

 “니는 오늘부터 다시 한 살이다. 건강하게 잘 크거라.”  하셨다며, 당신께서도 외할머니처럼 오빠 허리춤에 그걸 둘러 주고 싶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나는 이미 그때 알았다. 엄마의 저 소원은 결코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걸.

 어릴 때부터 엄마 품을 벗어나 자란 오빠는 나나  언니에게  있는 애틋함이 부족하다. 맘에도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모를 일이지만 살갑게 엄마 손 한 번을 잡아 드리지 못한다. 엄마가 등짝이라도 한번 쓸어볼라 치면 스스로 움츠려 들어 귓불까지 빨개진다.  그러니 엄마도 우리를 대할 때는 손도 잡고, 등짝도 훑어 내리는데 어쩐지 오빠랑은 내외하는 사이처럼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오빠가 태어나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는 엄마지만 오빠와는 살아생전 딱 그 거리를 유지하지 싶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 그날이 되면 오빠가 먼저 다가가 엄마의 손을 잡을 수 있을는지......


 어쨌든 그렇다.      

 드디어 설날이 되었고, 오빠가 엄마 앞에 세배를 드리고 일어서려고 하자 엄마는 세뱃돈 봉투가 아니라 붉은 복주머니와 두둑한 용돈 봉투를 꺼내셨다. 엄마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계신지가 내 눈에 다 보였다. 그 긴장감 속에 엄마가 오빠의 허리춤에 복주머니를 매 줘야 하는데 허리 주인이 화들짝 놀래서는 저쪽으로 도망을 가버리는 것이다. 이미 귀밑까지 빨개져서는 한사코 뭐 하러 그러냐는 오빠와 가까이 와 보라는 엄마의 실랑이가 한참을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 긴 시간이었다.      


 이미 서로 불편해진 두 사람의 어색함에 우리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수십 번도 넘게 그날 아들에게 복주머니를 둘러주시며 처음 아들을 만난 그날을 환희를, 행복을 재연하리라 다짐했을 엄마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해서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고 저를 주시면 안 되겠냐고 설레발을 처 보는데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자식도 끼고 살아야 자식이지 어릴 때부터 무슨 부귀영화를 볼 것이라고 부산 사는 동서댁으로 유학을 보낸 하나뿐인 아들은 대부분의 성장기를 엄마가 아닌 숙모의 손에서 보냈고 그만큼 엄마랑은 거리가 있었다.   

   


 미 현관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들을 대신해 며느리가 받았고, 수십 번을 연습한 엄마의 대사는 단 한 줄도 꺼내 보지 못하고 대본으로만 남게 되었다.

당신의 엄마처럼 근엄하고 당당하게 인생의 한 바퀴를 돌아 이젠 어른이 되는 아들에게 처음 당신께서 그 아들을 안은 날처럼 복주머니를 채워주시면 사랑을 표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어색한 분위기로 끝났으니 그날 문여사는 거의 나라 잃은 사람 모양을 하고 지냈다.      


 아버지를 산소를 다녀온 오빠기 자기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엄마랑 둘이 남았을 때 나도 딱 8년만 지나면 환갑인데 그때도 주머니 깁고, 그 안에 육만 천 원 넣고, 또 봉투 따로 만들어서 주실 거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화들짝 하면서 그때까지 살아서 어쩌겠냐며, 대신에 우리 것(내 언니와 나)은 미리 만들어서 용돈까지 넣어놓고 돌아가시겠다고 했다. 그건 반칙이라서 안 되고, 딱 내가 환갑이 되는 그 해에 비단 천을 끊어 와서 붉은 복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용돈도 오빠 준 거만큼 넣어서 허리춤에 달아달라고 했더니 그거는 약속하지 못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때 엄마가 내 허리춤에 복주머니를 달아주시면 하루 종일 그걸 차고 온 동네를 돌아다닐 자신이 있는데 아마도 그때는 살아계시더라도 그걸 만들 여력은 없지 싶다.       



 몇 해 전 외사촌 오빠가 환갑이 되는 해, 설날 고모한테 인사 온 당신의 조카에게 엄마는 붉은 복주머니를 만들어 건네주시면서 오빠의 건강을, 앞날의 편안함을 덕담으로 주셨다. 가까이 살다 보니 오빠랑 가끔 밖에서 술을 한잔 할 자리가 마련된다. 오빠는 당신 고모께서 조카 환갑이라고 붉은 복주머니를 만들어 용돈까지 넣어 주시면서 건강을 염려해 주셨다며 그런 고모를 가진 이를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며 자랑한다. 보태서 고모의 그 따뜻함에 대해 과하게 감사해하신다. 주변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거들어 그 고모가 바로 저희 엄마입니다. 하며 덩달아 괜찮은 사람이 되곤 한다.      


우리 엄마 문여사님은 그런 사람이다. 그 고모에 조카라 사촌오빠는 주머니를 받는 그 자리에서 당신 고모의 어깨를 하늘까지 승천시킬 만큼 감사한 말을 전했는데 그 보다 몇 곱절을 더한 정성으로 만든 아들의 복주머니는 며느리 손에 겨우 겨우 매달려 제 집으로 갔다.      

 요새말로 우리 오빠 참 정 털리게 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엄마의 죽음 앞에 질질 짜기만 해 봐라. 내 혼을 내 줄 작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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