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이 더하다.
새해가 시작되고 유난하게 겨울비가 잦았다.
오죽하면 농민들이 논에 밑거름을 해 두면 비가 다 쓸어간다고 했을까? 그렇게 시작한 2024년의 기후는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1~2월에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겨울비로 애를 먹었고, 우리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더위는 국가의 모든 에너지 정책을 바꿔놓을 만큼 별났다. 그리고 이젠 입동이 지난 지가 얼만데 아직도 사무실에는 선풍기를 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입동을 한 달쯤 뒤로 미뤄야 할지? 어쩌면 이젠 추분(秋分) 정도가 우리에게 오는 절기의 마지막으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긴 이건 좀 다른 문제이기는 하다.
태양과 지구가 자기네들 일은 충실히 잘하고 있어 입동이 지나고 나니 해는 입동에 들어가야 할 그 시간에 맞춰 저 산 너머로 숨어주고, 또 아침이면 좀 늘어지게 자고 천천히 솟아오른다. 그러니 유난한 더위도, 비도, 갑갑함도 태양과 지구와 자연의 탓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탓이니 절기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래 입동(立冬)은 잘못이 없는 거 맞네….
절기가 바뀌면서 퇴근하는 길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기세가 등등한 한 여름의 햇살을 마주하고 퇴근할 때 느껴지는 아직 하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한 안도는 없지만, 이젠 보람찬 하루를 마감했다는 또 다른 위안이 있다. 입동은 그렇게 제 역할로 내게 왔다.
입동이 지나고 달라진 게 하나 더 찾자면 혼자 시골에서 지내고 계시는 시어머니의 전화가 잦아졌다는 것이다.
‘서리 오기 전에 감을 따야 하지 않겠나?’,
‘배추가 속이 너무 차서 썩고 있는데 김치냉장고에 넣을 거 좀 빨리 김장하면 안 되겠나?’,
‘들깨를 좀 털었는데 가져갈래?’
매번 먹을 걸 가져가라는 안부를 달고 며느리에게 전화하신다. 시어머니의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천천히 하시면 안 될까요? ’
‘이 날씨에 서리가 내릴까요?’ 등 어떻게든 시어머니의 일 자리에 끼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대부분은 내가 성공했고, 내달에 해야 할 김장에는 1박 2일로 참여하기로 하고 타협을 마쳤다. 그 또한 그때 가봐야 알기 때문에 우리 시어머니께서 지신 거다. (나는 아들이 없어 시어머니 될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 같은 며느리는 영~)
내 어릴 적엔 추석이면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었다.
어느 한 해 어머니께서 추석이라고 옥종장에 가셔서 추석 장을 보는 김에 알록달록 무늬가 들어간 털 스웨터를 사 주신 적이 있다.
대부분의 내 옷은 우리 어머니의 손으로 만들어 입히셨다. 그야말로 핸드메이드 제품을 입고 컸는데 어째 자랑스러움은 얇고, 헛헛함은 크다. 여름에는 얇은 천으로 된 카라가 없는 셔츠, 겨울에는 언니들이 입었던 털옷을 풀어 실이 있는 만큼 허리부터 배꼽까지는 푸른색, 그 위로는 노란색, 팔은 양쪽이 짝짝인 기억에도 없는 색으로 짜진 옷들이었으니, 추석날 받은 일관성 있는 무늬와 색이 있는 털 스웨터가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는 옷이 좋았고, 지금은 추석에 털 스웨터를 입을 수 있을 만큼 시원했던 계절이 좋다. 어쩌면 그것보다는 그 설렘이 더 좋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에 보태 이젠 입동이 지났으니 나도 겨울 준비를 해봐야 하겠다. 이미 부엌에서 졸업했으니, 겨울이 되었다고 밑반찬을 준비할 일도 없고, 김장이야 예약되어 있으니, 시어머니의 일정에만 맞추면 된다. 대신 나의 자리에서 내 겨울 준비를 시작하는 걸로 정한다.
멋진 털 스웨터를 하나 장만해야 하겠다. 줄줄이 있는 언니들의 스웨터를 물려 입거나, 아니면 그 털옷을 풀어쓸 수 있는 실만큼만 덧달아 다시 짠 옷을 몇 개씩 돌려 입었던 내 어린 날을 위로도 할 겸 비싸고, 좋은 털 스웨터를 한 개쯤은 사고 싶다. 겨울 냉기가 코를 베 가는 날 캐시미어 안에 폭 싸여 출근하면 지겨운 출근길에 조금은 설레지 않을까? 색깔은 단색으로 사야지. 결코 오른쪽, 왼팔의 색깔이 다른 옷은 사지 않을 생각이다. 포근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군고구마를 먹는다면 더 행복해지겠지? 그러면 고구마도 한 박스쯤 미리 챙겨둬야겠다.
계절이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준비할 게 겨우 털 스웨터 한 장과 고구마 한 박스라니 어쩐지 내 욕망의 줄어듦은 보이나, 인생에 설렘이 없어 보여 바닥에 뒹구는 낙엽만큼 허전하기도 하네.
입동이 지났는데 아직도 가을이라니…. 쓸쓸함이 더해지는 날이다.
2024. 11월의 끝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