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보내는 올바른 자세 END

항거의 끝에 만난 위로의 음식 – 들깨 떡국

by feel

2024년을 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신간이 사납다.”였다. 신간이 편했다면 일상으로 살았을 그 시간, 덕분에 집으로 숨어들었고 그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갔다.

생각해 보니 그 불편함으로 인하여 지난 연말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연말연시를 보냈고, 몇 년 동안 쌓여 있던 쓰레기는 매립장으로, 재활용센터로 끌려 나갔다. 75리터 종량제 마대 10장을 사서 7장에 쓰레기를 담아나가며 내 속에 쌓인 화를 쓸어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집을 정리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2월 마지막 날 새벽에 집을 나섰다. 병원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쉬는 동안 아이와 여행을 하고 싶었다.

1년 동안 사막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아이는 몸과 마음이 피폐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받았고, 나 또한 긴 직장생활에서 오는 좌절로 인하여 상처가 깊었다. 그러니 둘 다 맘을 돌볼 시간이 필요했다. 치유라는 것이 밴드만 붙여도 돈이 들 듯,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데도 돈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돈을 싸 들고 길을 나섰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수원화성, 그리고 영주의 무섬마을 366년 된 고택에서 정월 초하루를 보냈다.

지리산이 보이는 산골, 대문도 없고, 사방이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문고리 걸어감서 유년을 보낸 나도 고택의 하룻밤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애는 어땠을까? 내 옆에 딱 붙어 ‘화장실도 같이 갈래?’, ‘물 가지러 갈 건데 엄마 같이 가.’를 연발하며 우리는 아주 사이가 좋은 모녀지간이 되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집이 아주 오래된 고택(병자호란 직후 지어진 집)이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시골 마을에서 간판도 없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낮에 막걸리와 배추전을 팔던 가게는 해가 지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고, 집 주인아저씨의 적극적인 소개로 무섬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들깨 칼국수 집을 찾아 나섰다.

간판도 없고, 길도 모르고 방향만 알고 나선 길에 몇 번 이집 저집을 들어가 봤지만, 도대체 식당으로 보이는 집은 없었다. 차를 끌고 영주 읍내까지 나가서 저녁을 먹고 와야 하나 싶을 때 동네 아주머니 한 분께서 아주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계셔서 아주머니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혹시~칼~국수”하는 순간, “아 만죽재에서 주무시는가 봐요?” 하신다.

아마도 만죽재 사장님과 이 식당이 협업관계인 듯하다. 그렇게 간판도 없는 식당에 들어가 구들장을 깔고 앉아 들깨 떡국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엄마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동그란 옻칠한 밥상 위에 참깨 동동 띄운 떡국이 나왔다.

첫맛이 너무 고소하고, 두 번째 맛은 밍밍하고,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우리가 먹는 떡국은 육수를 내고, 소고기 고명을 올리고, 계란 지단을 또 올려 깊은 맛이 냈다면 무섬마을의 떡국은 맹물에 갓 빻은 들깻가루 가득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한 국물에 떡국을 끓여 내 고명으로는 통깨를 뿌려주는 것이 다였다. 묵은김치와 무채를 반찬으로 한 그릇이 뚝딱이다.


이번 여행의 출발이 치유였지만 여행 내내 아이는 아이의 터널에서, 나는 나의 굴속에서 뒤죽박죽 돌아다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러했으니 이미 수원에서 출발하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되고, 속이 너덜너덜했었다. 그 아픈 상처에 밋밋하고 뜨끈한 국물이 한번 쓰다듬었는지 떡국을 먹고 나서는 길에는 맘이 녹아 서로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모녀다.


남도의 굴을 넣은 떡국, 우리 시댁의 멸치육수에 소고기 고명을 올린 떡국도 물론 맛있다. 그런데 이렇게 맑고 깨끗한 밋밋한 맛의 떡국은 색다른 맛이다.

집으로 돌아와 만들어 먹어보자 벼르고 왔지만, 아직 시도해 보지는 못하고 있다. 밋밋한 맛이 그리워지는 날 뜨끈하고, 고소하게 떡국 한 그릇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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