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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Dec 20. 2024

떡국 먹고 한 살 먹자

떡국 먹고 한 살 더 먹어도 지혜로워지지는 않을 것이다만.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 먹어 나이 듦이 속속들이 배여 나면 좋겠지만 속은 더 좁아지고, 삶은 더 팍팍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너무도 주관적이라 아직도 위로 전화조차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ㅠㅠ) 부당한 인사에 항거하며 내 생에 가장 긴 개김의 휴가를 냈다. 이 판단으로 내 직장에게는 찍힘의 명확한 사유를 준 게 맞다. 그리하여 나중에 발등을 찧다 못해 발목을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지금을 견딜 수 없다면 일단은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미련하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가슴을 부여잡는 건 33년을 밥벌이에 내몰았던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닌 나에게, 오롯이 나에게 예의를 다하기로 하고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당분간만....ㅠㅠ)


 잘했다.

잘해도 너무 잘했다.

첫날은 좀 슬펐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가라앉고, 집청소를 시작했다. 부엌바닥에 무슨 음식 자국이 이렇게 들러붙어 있단 말인가? 내 맘에 덕지덕지 붙어 있을 그 무엇들을 닦아낸 것인지 청소 한 번에 맘이 싹~ 가라앉았다.


다음날이 마침 작은애의 생일이라 오후에는 먹을거리를 좀 사 왔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재료를 다듬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깊은 잠을 잤다. 잠들기 전에 모든 알람을 끄고 잤더니 일어나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이 또한 기분이 좋다.

천천히 밥을 안치고, 미역국을 올려놓고는 한 끼 먹을 만큼 잡채도 만들었다. 요즘 맛이 올랐다는 시금치도 무치고, 명란을 구워 김도 구워 준비했다. 제법 근사한 생일상이 차려졌다.

마침 아내의 첫 항거를 위해 남편도 출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바람에 남편도 백수, 이직을 준비 중이라 시험결과를 기다리는 작은애도 백수, 나는 예비 백수 이렇게 백수 셋이서 아침아침밥을 준비했다. 생일상이니 남편백수가 나가서 케이크를 사 오고 해서 축하노래도 불렀다. 아이의 앞날엔 상처가 없기를 기도했다만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떻게 상처가 없을까? 지혜롭게 잘 넘기길 바랄 뿐이지. 리고 밥상머리에서 앞으로 나는 하루에 5만 원 이상을 쓰면 부도가 나니 극한의 검소함으로 살아야 된다고 했더니 다들 자기네가 더 가난하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렇다. 이젠 나는 가난한 백수의 삶을 준비한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밥을 사지 않을 것이고, 별다방 커피도 끊고 오늘부터 원두를 직접 갈아서 얼음 띄워 먹기로 했다.(선언이다.)


그렇게 40여 일의 백수의 첫날을 시작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할 것이고, 어쩌면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짐작컨대 99%의 확률로 내가 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이다.


 생각이 많은 아침으로 떡국을 준비한다.


김장을 하고 한 3주쯤 지나면 김치가 맛이 없는 시간이 온다. 지금이 딱 그렇다. 그럴 때는 국물이 있는 음식이랑 먹으면 국물의 맛에 김치의 설익음이 희석되어 괜찮다. 그래서 이 시기쯤에는 시래깃국이나 떡국 같은 국물음식을 많이 먹는다.

그러고 보니 김치나 사람이나 비슷하네. 갓 만든 생김치는 특유의 산뜻한 맛에 자꾸 손이 가고, 시간이 조금 지나 잘 익으면 그냥 먹어도 맛있고, 김치찌개를 해도 맛있고, 볶아도 맛있고 그것이 무엇인들 다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설익은 김치가 문제다. 맛도 어중간하고, 김치찌개를 해도 개미가 없고 일단은 그냥 익혀야 쓰임이 생긴다. 사람도 그렇다. 젊어서는 그 자체로 멋지고, 잘 나이 든 어른의 쓰임은 그 동네 전체를 밝힌다. 어중간한 나 같은 중늙은이가 문제다. 고집도 세고, 목소리 크고.... 아이고 귀찮은 존재이겠다.


김치 이야기를 하다가 또 중간으로 샜다.

우리 집 떡국은 멸치육수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고명은 다짐소고기 볶음, 지단, 그리고 김이 전부다. 육수는 멸치를 넣고 간장으로 가볍게 간을 해 준비한다. 그리고 계란 지단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필요한 만큼 준비한다. 소고기는 나는 잘게 다짐육을 한 팩을 준비해 간장과 참기름에 붉은색이 사라질 때까지 볶아 준비한다. 김은 원래 조미 안 된 김을 구워 준비하는데 없으면 조미김을 잘라서 사용해도 된다. 다만 그때는 간을 좀 더 심심하게 해야 된다.


떡국은 너무 쉽다.

팔팔 끓는 육수에 찬물에 한번 씻은 떡국 한 주먹(1인분)을 넣고 떡이 떠 오른다 싶으면 완성이다. 넓은 그릇에 떡국을 건져 미리  담고 국물을 적당하게 잡는다. 그리고 간은 소고기 볶음으로 맞추면 된다. 그 위에 지단과 김을 올려 내면 끝이다. 김장 김치랑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면 세근은 안 들어도 배는 든든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꼭 더 지혜로워져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나이 들어 지혜로워지면 참 좋은 일이라 싶어 진다. 오늘 떡국 한 그릇으로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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