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하다 도토리 묵까지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친구 따라 지리산 깊은 집을 들락거렸다.
왜 젊디젊은 사람이 일은 안 하고 놀러나 다니냐고 묻지 않아서 좋았고, 자기네들은 염소를 돌보느라, 집안일을 하느라 바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도와달라는 말도 안 하고, 밥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밥상에 내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나는 기껏 설거지 정도만 거들면 좋은 공기도, 여유도, 봄도, 가을도 다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니 맘이 불편하거나 우울해지면 지리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밥을 얻어만 먹고 오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내가 주전부리를 사서 가기도 하고, 봄에는 화전을 부쳐 먹을 것이라 호기롭게 꽁꽁 언 새알심을 사 가서는 억지로 그걸 녹여 어림도 없는 화전을 만들기도 했다. 감자가 나올 때 감자전을 만들어 음….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건 아니다. 나도 덩달아 오바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이 오는 날. 물매화가 이쁘게 피는 시간.
물매화만 보고 내려왔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인데 어쩌다가 송이를 욕심냈을까. 송이가 혹시 올라왔을지 모른다며 능선을 따라 걷다가 송이는 냄새도 못 맡고 도토리만 한가득 주워 왔다. 지리산 국립공원 길을 걷다 보면 “다람쥐와 경쟁하시겠습니까?” 하는 현수막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나는 절대 다람쥐나 멧돼지랑 경쟁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무조건 이긴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가득 도토리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곧 도토리묵을 만들어 막걸리 사 들고 오겠노라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볕 좋은 베란다에 버려두었다. 내용이야 볕에 말린다고 했지만, 현실은 시간이 나지 않아서 내버려 둔 것이다. 가끔 빨래를 널 때나 걷어 올 때 도토리와 눈이 마주치면 괜히 주워 왔다는 후회를 하면서….
그러다 날을 잡아 남편을 대동하고 도토리를 깠다. 벌레 먹은 애들도 있었지만, 적당히 버릴 것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양이 많았다. 먼저 사흘 동안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렸다. 인터넷과 유튜브를 총동원해서 몇 날 며칠 동안 물을 갈아가며 우려내니 도토리가 팅팅 불어 집에서 믹서기로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둘이서 믹서기를 가운데 놓고 반나절은 갈았지 싶다. 그리고 그걸 두부 비지 만들 듯 면포에 넣어서 물을 짜냈다. 한 방울이라도 다 우려낼 것이라 집에 있는 대야를 세 개나 꺼내서 물을 받았다. 그리고 소금을 적당히 쳐 하루 내내 기다렸는데 도대체 뭐가 가라앉는 느낌이 없었다. 아무래도 잘못된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결국 위에 물을 따라버리니 아래에 전분이 밝은 갈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빡빡 긁어내 햇볕에 말리니 금방 딱딱하게 물기가 말았다. 그걸 믹서기에 갈면 파우더가 된다. 봉지나 통에 넣어 냉장보관하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젠 도토리묵이다.
일대 육의 비율, 이것만 잘 지키면 도토리묵 만들기는 팔심과의 전쟁이다. 도토리 전분을 한 컵 들어내고, 물 여섯 컵을 부었다. 그리고 잘 풀어 처음엔 강한 불에 올렸다. 이때 방심하면 안 된다. 나무 주걱으로 열심히 저어야 한다. 그러다 끓어오른다 싶으면 바로 3 또는 4단계쯤 불을 내리고 30분 동안 열심히 바닥에 도토리 전분이 달라붙지 않도록 저어야 한다. 살짝만 방심해도, 불 앞을 떠나도 그날의 도토리묵은 다 태워 먹고 맛도 없어진다. 그렇게 28분쯤 지나면 도토리묵에서 거품이 풍성처럼 부풀어 올라도 터지지 않고 그대로 가라앉는 순간이 온다. (그전에는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와서는 그대로 터져버린다) 그때 밥 숟가락으로 들기름 두 숟가락을 넣고, 소금은 작은 커피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정도 넣으면 된다. 그러면 또 이놈이 색깔을 싹 바꾼다. 더 밝아지는 느낌이다.
30분 동안 혼자서는 못한다. 반반씩 남편과 번갈아 저어야 한다. 그리고 끝이 나면 네모난 유리 반찬통에 표면에 들기름을 살살 바른 후 다 끓은 도토리 죽을 부어서 시원한 곳에 4시간 정도 두면 탱탱한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어찌나 탱탱하던지 서너 살 먹은 아기 볼때기를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묵이 만들어졌으니 이젠 양념장을 만들 차례다.
양념장은 음…. 자신이 없다. 그런데 너무 짜도 맛이 덜하고, 진간장에 대충 만들어도 묵 맛이 별로다. 어간장과 진간장을 2:1 정도면 나는 좋았다. 그리고 고춧가루, 마늘을 넉넉하게 넣고, 쪽파…. 이게 꼭 있어야 한다. 쪽파를 다져 넣어주면 어마어마하게 맛있는 양념장이 완성된다. (아~ 깨소금은 진짜 듬뿍 넣어야 한다) 그 담부터는 알아서 먹으면 된다. 썰어서 먹고 싶으면 썰어서 드시고, 숟가락으로 퍼서 먹고 싶으면 숟가락으로 퍼서 드시고. 등등 이렇게 맛있는 도토리묵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딱히 설명이 안 될 것이다. 이젠 묵을 만들었으니 다음에는 묵사발을 만들어 먹어봐야겠는데 그건 아무래도 퇴직 후에나 가능하지 싶다.
볕이 좋은 날 토요일 저녁에 묵을 쑤어 밖에 내놓아 굳히고, 양념장을 챙겨 지리산에 들어갔다. 이미 잘 차려진 점심 상위에 묵을 꺼내놓고 굳이 가장 가운데 자리에 묵 접시를 내려놓았다. 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딱 한 번만 먹어보시라 권하며 애를 태웠다. 처음에 시큰둥하던 사람들이 남겨둔 묵까지 챙겨와 바닥을 내는 걸 보면서 어찌나 뿌듯하던지…. 또 한 가지 직업이 늘었다.
묵 장사를 해야겠다.
가을이 지나는 일요일 점심 때 쯤 시댁에서 가져온 김장김치 한 포기와 토란 들깻국 그리고 도토리묵 한 덩이를 들고 문여사를 찾았다. 틀니를 다 빼놓고 주무시던 문여사가 서둘러 틀니를 끼우고 김치도 한 조각 찢어 맛을 보시고, 토란 들깻국도 한 그릇 들어내고, 토도리 묵도 한 덩이 잘라서 맛있다고 그 자리에서 맛있다 드시는 모습을 보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2023년 가을을 먹는 것들을 엄마랑 나누는 걸로 보내고 이젠 겨울을 맞는다.
겨울엔 뭐니뭐니 해도 동지팥죽이지. 아닌 호박죽인가?????
2023. 11월에 이어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