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회복탄력성
11월말에 갔던 여행은 내 여행의 역사에서 가장 망한 여행이었다. 여행갔던 도시 하노이의 매력도 발견을 못했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니 스쿠터들의 폭주에 기가 확 질렸다), 여행중에 독감에 걸려 호되게 앓은 뒤 후유증으로 악간의 우울증까지 2주 정도 끌고 다녔고, 집에 와서도 시차와 독감으로 정신을 못차렸을 뿐더러, 남편의 2주 출장이 바로 여행 뒤라서 독박육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다 탈탈 털렸다.
그러다보니 여행가기 전에 공들여 만들어두었던 일상과 쌓고 있던 노력들이 한꺼번에 확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무력하게 보기만 했다. 달리기는 하노이에서는 호안끼엠 호수를 끼고 탁한 공기를 뚫고 한번 뛰고 독감에 바로 걸려서는, 지난 2-3주간 전혀 할 마음도 시간도 체력도 안났다. 오전의 루틴, 낮에 일하는 시스템, 아이의 저녁 루틴도 다 일괄적으로 망가져 버렸다.
확 다 망하니까 생기는 일이, 오늘 아침에 망했으니 낮에도 계속 망하고, 오늘이 망했으니 내일 하자고 저녁에도 망하고, 월화수가 망하면 목요일은 아직은 쉬는 게 낫겠다고 망하고, 금토일은 주말이니까 망하고, 월요일이 돌아오면 주말에 무리해서 제대로 돌아가보려 했다가 망하고, 망함의 streak이 오래 가는 거였다. 다시 헤어나오는데도 무척 무기력했다.
그래도 이번주부터는 에너지가 좀 더 생기고 조금씩 다시 이전에 이것저것 열심히 했던 것들을 하나씩 도로 챙기기 시작하고 있다. 11월에 올해 세번째 하프마라톤으로 정점을 찍고 11월말부터 개점휴업 상태인 달리기는, 이번주에야 겨우 다시 뛰기 시작했다. 뛰고는 싶은데 뛰기 시작하면 바로 그만하고 싶어져서 1마일, 1.5마일 거리로 처음부터 돌아가서 뛸 수 있는 거리를 바닥부터 다시 쌓고 있다. 다른 생활습관들도 다 처음부터 다시. 아휴.
올해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체력이 좀 좋았어서 오랜만에 이렇게 폭망을 경험해 보는 것인데, 이번에는 슬럼프에서 최대한 속력을 내어 벗어나오면서 몇가지 노트한 것을 공유해 본다.
아프면 슬럼프가 온다. 더 아프면 더 오래 깊게 온다. 처음 아프구나 자각이 올때 일을 손에서 놓고, 정성을 들여서, 쉬고 치료하는 게 낫다. 꾸역꾸역 일을 잡고 있어봐야 생산성은 낮고 오히려 더 회복이 더디어진다. 조금 신호가 왔을때 신호를 잘 포착하여 멈추고 회복하여 다시 달릴 수 있는 것이 이제는 나의 프로페셔널한 스킬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
슬럼프에서 헤어 나올때는 무작정 자기자신에게 관대하게 조금씩 다시 픽업을 해야 한다. 본래하던 것에서 터무니없이 작은 단위로라도 “해냈다”라는 것에 포커스를 두어 작게 작게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엉터리로 한 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나?”하는 머릿속의 소리는 잠재우자. 요새 뛰러 나가면서 많이 되새기는 것은 “Bad run day is way better than no run day.” 나가서 한 블럭을 뛰고 들어오더라도 안 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나간다. 일도 마찬가지여서 일단 요거 정리하는 것만 해야지, 일단은 이거 셋업 하는 것만 해야지 정도로 가볍게 시작했다. 하루하루 작은 거라도 하고 했다고 트래킹 하는 것(CoDo App의 Check-in)이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언제나 내가 강조하는 것처럼 같이 하는 사람들(CoDo App의 CoDoers)가 있는 것이 이번 회복에도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슬럼프에 있는 동안은 친구들이 우리들이 같이 하고 있던 챌린지를 매일매일 각각 해내고 했다고 공유해주는 메시지도 나는 못하고 있으니까 자격지심에 보기 귀찮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떤 걸 한 건지 궁금해서 아예 알람을 끄듯이 꺼버리지는 못하고 종종 그룹 챌린지 방에 들어가서 눈팅(?)을 했다. 눈팅이라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에 자극을 받고 “아 나도 빨리 도로 아침 루틴을 제대로 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혹은 “다시 달리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친구들에게 나 아프다 엄살을 좀 떨고 푹 쉬고 나서 빨리 돌아오라는 기다림을 받는 것도 아예 놓아버리지는 않는 것에 도움이 크게 되었다.
폭망과 슬럼프에서 벗어나오는 것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배우는 것처럼 어떻게 벗어나올지 익혀놓으면 다음번에는 그 방법들을 써먹으며 더 빨리 슬럼프에서 회복이 된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탄력성이 좋아지기도 한다. 이번에는 폭망을 겪으면서 집에 상비약들을 구비하고 겨울맞이 체온유지 준비를 하고, 스케쥴을 살짝 변경해서 생산성이 좋은 시간을 더 길게 만들어낼 방법을 찾았다. 이번 겨울은 이번 한번으로 덜 아프고 잘 넘어갈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