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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Sep 05. 2021

정상에 대한 환상을 버리기

<다가오는 말들> 읽고 쓰기

"다섯 살이 게임하지 말랬다고 엄마 밉다고 하는  정상이야?"

남편에게 소리쳤다. 남편은 "그래, 내가 비정상이다!"라고 맞받아쳤다.



둘째를 낳으며 나와 남편은 철천지원수처럼 싸워댔다. 알고 지낸 지 20년에 가까운 사이였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았고 공격 거리도 그만큼 많았다. 비난을 퍼부을 거리가 바닥날 무렵, 그는 기어이 나의 첫째 육아를 건드렸다. 그가 2년 동안 해외 근무를 하는 사이 아이를 '독박 육아'했기에 육아에 대해서 만큼은 그가 할 말이 없을 거라 믿었다. 저녁도, 주말도 없이 오롯이 나 혼자서 돌쟁이 아가를 걷고 뛰고 말하고 노래하는 작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곁에 없었던 남편이 육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는 나에게 너무 유난이라고, 남들처럼 TV도 보여주고 플라스틱 장난감도 사주고 키즈카페도 가고, '평범'하게 키워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네가 사서 고생해놓고 그 보상을 왜 나한테 찾느냐고 따졌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내가 만들어 놓은 육아 원칙에 맞춰 아이를 돌보기에 내 생각을 지지하는 줄 알았다. 속으로 내 육아관을 비난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고, 그래서 그의 비난이 충격적으로 아팠다.



냉전 중에 둘째를 낳았다. 그는 주말마다 첫째 돌봄을 도맡았다. 첫째는 엄마랑 있을 때는 먹지 못했던 식당 음식, 시판 간식, 시판 음료수를 먹었고, 엄마가 데려가지 않는 키즈카페, 놀이공원을 아빠랑 다녔다. 주말마다 숨 고를 새도 없이 하루 종일 놀고 온 아이가 월요일에 기진맥진해서 등원을 못하거나 감기를 달고 사는 걸 그는 몰랐다. 더 싸우고 싶지 않아 그의 놀이 방식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다 기어이 일이 터졌다. 그의 스마트폰에 있는 게임을 첫째가 하고 있었고, 아이에게 미디어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던 나는 눈이 뒤집혀 버렸다. 유난 떠는 나 보란 듯이 애한테 게임을 시켰냐고, 다섯 살한테 스마트폰 게임을 쥐여주는 게 제정신이냐고, 그간 싸움을 피한 노력이 무색할 만큼, 아이들 앞에서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며 날뛰었다. 아빠 스마트폰을 낚아챈 내게 첫째는 "엄마 미워!"라고 외쳤다. 나는 "이게 정상이냐"고 따져 물었고, 그는 "내가 비정상이라 그렇다"고 비아냥댔다.    



육아관의 차이로 싸우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우리는 유독 '정상'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싸울 때마다 이건 정상이 아니라고, 네가 하는 건 비정상이라고 서로를 몰아세웠다. 정상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입에 올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둘째를 낳고 '정상가족'에서 이탈한 직후의 일이다. 둘째는 21번 염색체가 3개인 '이상'을 가진 장애아였고 우리는 장애아 가족이 됐다. 한 번도 신경 쓰지 않고 살던 '정상'이라는 말이 목에 박힌 가시처럼 아픈 말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말로는 '일반', '평범'이 있다. 연예인이 비연예인을 칭할 때 '일반인'이라고 말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장애인에 대응하는 말로 비장애인 대신 '일반인'을 쓴다는 걸 예전엔 인지하지 못했다. 세상은 장애아가 아니면 '일반 아이', 장애 학생이 아니면 '일반 학생', 특수학급이 아닌 학급을 '일반 학급', 특수학교가 아닌 학교를 '일반학교'라고 부른다. 내 아이는 일반학교에 다닐 수 없거나, 다니더라도 일반 학급이 아닌 반에서 수업을 듣는, 일반 학생이 아닌 아이가 될 것이다. 아직은 어려서 '일반'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데 아이가 크고 장애가 드러날 때가 되면 어디로 보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둘째의 장애를 밝혔을 때 한 지인은 "평범한 아이 키우기도 힘든데 너는 얼마나 더 힘들겠냐"며 모나게 굴지 말라고 충고했다. 졸지에 나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평범하지 않은 엄마가 되었다.  



장애아의 엄마 중에는 산전검사에서 모두 '정상'이었는데 왜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 건지 모르겠다고 산부인과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첫째가 모든 산전검사에서 '정상'이었고, '정상'으로 태어났기에 둘째 산전검사에서 '이상'이 나와도 실제로 이상이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아이를 낳고, 염색체 결과지를 눈앞에서 확인할 때까지 검사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우리 아이는 '정상'일 거라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둘째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딸 하나, 아들 하나인 4인 가족을 꿈꿨다. 내가 그리던 미래에 매일 재활치료실과 종합병원에 다니는 일상은 없었다.



둘째의 장애를 알리고 글을 쓰자, 한 지인은 "너는 어쩜 그렇게 훌륭하니"라며 칭찬했다. "알잖아. 안 훌륭한 거. 글에서만 그런 척하는 거야."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면에서, 온라인상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도 똑같이 사랑하는 훌륭한 엄마인 척하지만 진짜 나는 매일 두렵다. 유아차에 앉은 둘째를 보고 귀엽다고 웃어주는 이웃들이 아이가 커서 생김이 조금 다른 게 드러나고, 발음이 어눌하고, 나이답지 않게 말하고 행동할 때, 지금처럼 귀엽게 봐 줄까? 세 살인 지금은 치료사, 의료진들이 귀여워하지만 학교에 가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규칙을 이행하지 못하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아이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둘째의 장애 때문에 첫째에게 힘든 일이 생긴다면, 나는 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에도 가족사진을 sns에 올리곤 했다. 네 명이 함께 찍은 사진 밑에는 "행복한 가족이네요", "예쁜 가족 보기 좋아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근육에 힘이 없어 앉지 못하는 아이를 겨우 기대어 앉혀서 늦은 백일 사진을 찍었다. 첫째 백일 때부터 정기적으로 가족사진을 찍어온 집 근처 사진관이었다. 첫째 이름도 기억하는 사진작가님이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걸 눈치챌까 걱정이 됐다. 사진을 찍는 동안 괜히 그에게 말을 걸고 이것저것 부탁했다. 그 역시 아무렇지 않은 부부인 것처럼 대답을 하고, 카메라를 보고 웃기도 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가족상이 있는 게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 덕에 '정상가족'을 연출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을 때도 우리는 첫째가 원한다는 핑계로 종종 가족 나들이를 했고 화목한 가정을 연기했다.



원수같이 싸우면서도 그와 함께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라도 나는 정상성을 가진 척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아이에게 장애가 있지만 우리는 행복해'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서 가정이 파탄 났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둘째의 장애가 아무 타격도 주지 않았다는 듯,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엄마 노릇을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비장애인으로 한 평생 살아온 내가 갑자기 무결하고 훌륭한 장애아 엄마가 될 수는 없다. 미처 자각조차 하지 못한 편견이 내 안에 가득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아이에게 수치심을 가르칠까 염려된다. 정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매일 모순된 말을 늘어놓고, 불안과 슬픔에 자주 빠지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고 글로 쓰면서, 혼자 서고 걷지 못하는 세 살 난 둘째를 조급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 다짐은 그저 이 혼란과 흔들림을 전부 말하고 쓰겠다는 것,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 덜컥 장애아 엄마가 된 비장애 여성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상을 사는지 세상을 향해 자꾸 외칠 거라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수치와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진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놀라운 기적"(<다가오는 말들> 256쪽)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를 품고 쓴다.



'감응의 글쓰기' 수업 과제로 <다가오는 말들> 읽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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