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요즘 시대에는 참 맞지 않는 사람이다. 12년의 직장 생활 중 절반은 워라밸 없는 야근 지옥에 살았고, 나머지 절반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적절한 균형’에 만족하기보다는 ‘끝없는 결핍’에 힘들었다.
나는 맡은 일을 미련스럽게 열심히 하는 면이 있고, 영악하지 못해 감정을 숨길 줄도 잘 모른다. 그리고 남보다 나 자신에게 꽤 엄격하다.
대학교 1, 2학년 때는 연극학회 활동에 몰두했고 토익 좀 따 보겠다며 첫 번째 휴학을 했을 땐 ‘록 페스티벌’ 대학생 기획단이 되어 영어 공부는 제쳐 두고 매일 홍대 앞을 드나들며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몇 만 명이 찾는 축제를 만들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기필코 ‘영어 울렁증’을 없애고 글로벌한 사람이 되겠다며 떠난 캐나다 어학연수에서는 11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영어로 꿈을 꿀 정도로 이를 악 물고 영어로 쓰고 말했다. 수업 과목이 아닌 언어로서 영어를 배우고 세계의 친구들을 만나며 한 층 성장한 나를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응시했던 토익은 900점을 넘겼다.
첫 직장이었던 홍대 앞 문화 기획 회사에서도, 다음 직장이었던 온라인 광고 대행사에서도 야근은 일상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항상 내가 가진 능력치보다 큰 일을 맡았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썼다. 내 그릇은 아직 작은데 더 많은 걸 담아야만 하니 밤을 새워서 라도 내 그릇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틈만 나면 곱씹었고 자책했고 그러다가 남도 나도 인정할 수 있는 성과를 내면 한없이 뿌듯했다. 그런 뿌듯함이 쌓이고 쌓여 나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자존감이 되었다. 조금은 벅차도 이 일을 통해 배움이 있다면 더 잘 해내고 싶었다. 그때의 내게 워라밸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일을 통한 성장과 성취만으로도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적당히’를 납득하지 못하던 내가 처음 ‘적당히’를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건강의 이상 신호 때문이었다. 밤 10시 퇴근은 빠른 편, 새벽 퇴근도 잦던 대행사 AE 시절을 1년 넘게 보내니 오후가 되면 허리가 아파 앉아 있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목, 허리 디스크가 심해지고 살이 쭉쭉 빠졌다. 그때 살면서 내 인생 최저 몸무게가 되기도 했는데 다이어트도 아닌 ‘힘들어서’ 살이 빠지다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한 템포 쉬어 가자’ 마음먹었지만 퇴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제안이 들어온 회사에 입사했고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예전 같은 철야는 아니어도 머릿속에 한가득 일을 집어넣고서 ‘열심히 일하고 성취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이어갔다.
첫 아이 출산 때 자궁이 3cm 열려 오늘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직 끝내지 못한 인수인계가 떠올랐던 나다. 얼른 회사에 가서 업무 정리를 하고 오겠다며 진통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회사에 가서 2시간 동안 인수인계 문서를 작성하고 병원에 입원했었다. 생각해보면 첫 아이 임신 때는 뭘 잘 몰라 용감했던 것 같다. 팀장인 내가 처음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었기에 인수인계 없이 바로 입원을 하는 것이 내게는 더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느껴졌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젠 더 이상 나의 선택으로 인해 ‘하나’에 몰두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평생직장에 ‘엄마’라는 직책으로 취직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엄마’라는 직책은 세상 무섭고 어렵고 힘든 일이었던 거다. 한 마디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아이 출산 후 느낀 감정들은 정말 여러 가지인데 행복과 기쁨만큼이나 두려움도 컸다. 나의 무지와 실수로 아이가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막중한 책임감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내게 ‘적당히’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은 마음먹어도 잘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제 ‘엄마’는 내 인생의 디폴트 직책이 되었다. ‘집에선 엄마, 회사에선 팀장’ 심플하게 나누고 싶었지만 친정 엄마가 아이들을 돌봐 주신다 해도 업무 중 걸려오는 어린이집 전화는 나의 몫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내게 일과 육아의 분리는 불가능했다.
아이가 다쳤을 때, 아플 때,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우는 날이 길어질 때… 그걸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우고 일에 몰두할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사야 하고 유치원 준비물은 미리 챙겨야 했다. 학부모 상담이나 참여 수업 일정은 미리 체크해 연차계를 제출했다. 일과 육아는 서로의 영역을 더 자주 침범했고 그렇게 내 삶은 뒤죽박죽이 되어 갔다.
‘적당히’ 두 가지를 잘 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많다. 출근하면 일에 몰두하고 퇴근하면 또 아이와의 시간에 집중할 줄 아는 워킹맘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나는 일이든 육아든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은, 꽤나 예민하고 아주 피곤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일과 육아 모두 순탄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휴가 같은 것이었다. 대개는 일이든 두 아이에 관한 것이든 풀어야 할 숙제가 항상 존재했다. 꼭 일과 육아를 함께하지 않더라도 어떤 일이든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다만 나는 두 가지가 뒤섞이는 상황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투잡러는 처음부터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어딘가 불편하고 하나를 벗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솟구쳤다.
8년 전 내가 전 직장으로 이직했을 때 나는 많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가 내게 보여준 것은 크게 없었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새로운 조직을 꾸려 그들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4년이 지나고 업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비전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버티기만이 지속되었다. 회사는 살아 남기 위해 한 발 앞서 나가기보다는 몸을 움츠리고 버티기를 선택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티는 것 치고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매출 신장도 이뤄냈지만 이익 구조는 더욱 악화되었다. 내가 이 회사에서 그렸던 비전은 사라진 지 오래.. 팀장이라는 자리와 내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일을 해 나갔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성장하고 성취하던 예전이 그립기도 했지만 가족이라는 평생직장에서 ‘엄마’라는 직책을 가진 내게 일에만 몰두하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직장에서의 비전은 상실되고 책임감과 경제적 이유로 투잡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엄마’ 역할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퇴근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약 4시간.. 그 시간 안에 저녁 준비를 하고 밥을 먹이고 씻기고 놀고 책 읽어주고 재우는 일을 하다 보면 항상 시간에 쫓겼고 아이들이 유독 말을 잘 듣지 않는 날엔 화를 내기 일쑤였다.
‘하나’를 제대로 잘하려고 해도 온 에너지를 쏟아붓던 내가 ‘둘’을 병행하며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둘 중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싫었다. 한심했다. 그럴듯한 커리어 없는 팀장도, 소리 지르고 화내는 나쁜 엄마도 다 내 모습이었다. 그중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쁜’ 엄마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은 국룰. 회사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며, 나 자신도 이렇게 매일 화를 내다 가는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화가 습관이 되어가는 것이 두려웠고 더 나은 엄마, 사람이 되기 위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기로 했다.
어느새 퇴사 두 달 차. 오롯이 ‘엄마’라는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로서의 내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요, 아이들에게 화를 내던 습관도 한 번에 고치긴 어려우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내가 그랬듯이 ‘하나’에 몰두하고 노력하다 보면 천천히 나를 바꾸고 지친 내 마음도 좋은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렇게 될 나를 믿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