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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청이 Oct 24. 2024

[단편소설] 재즈

Ella Fitzgerald - Summertime

어둡고 낡은 재즈바.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측음기에서 재즈 소리가 나직이 깔린다. 오래된 사진의 피사체 같은 공간에 늙은 남자가 들어왔다. 익숙하게 바 테이블 두 번째 자리에 앉아 바텐더를 부른다. 옛 되어 보이는 바텐더가 생글 웃으며 묻는다.


"첫 잔은 진 토닉이죠?"


늙은 남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저 바텐더가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저렇게 젊은 바텐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매 년 오던 곳이니 다른 바텐더가 사전에 언질을 줬나 보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텐더가 늙은 남자에게 잔을 건넸다. 건네진 잔을 받으려 늙은 남자가 묻는다.


"이곳에서 젊음을 허비하기엔 아깝지 않소?"


자칫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질문에 바텐더는 싱긋 웃으며 답한다.


"잠시뿐인 걸요."


건네받은 잔을 홀짝 음미해본 늙은 남자는 나쁘지 않다는 평을 내린다. 낮게 깔린 재즈 음악의 전주가 끝나고 노랫말이 들려온다.


- Summertime. And th livin' is easy. (여름의 시간. 살기 좋은 시간이란다.)


음악을 감상하던 남자가 곡 이름 말한다.


"Ella Fitzgerald(엘라 피츠제럴드)의 Summertime(써머타임) 이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낮게 웃는다.


"이곳이 번성하던 때도 있었지."


언듯 들으면 혼잣말 같은 말에 맞은편에서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던 바텐더가 대꾸한다.


"그랬나요?

"그래. 바텐더도 여럿 있었고."


늙은 남자가 텅 빈 바를 스윽 둘러본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라고는 늙은 남자밖에 없었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바텐더 역시 그 한 사람뿐이었다.


"단골도 많았지. 이런 늦은 시간대에도 북적북적하던 시절이 있었어. 누군지도 모르면서 살갑게 인사하고. 재즈를 안주로 술을 연거푸 들이켰지. 그거 아는가? 사람이 많으면 사건사고도 많다네. 특히 그 시절 이런 재즈 바에서는 유독 그런 일들이 많았지."


집고 온 지팡이로 카운터 한쪽을 톡톡 친다. 늙은 남자의 지팡이 방향으로 산화된 검은 핏자국이 언뜻 보인다. 컵을 닦던 바텐더의 손이 잠시 멈췄다.


"몰랐네요. 오래전부터 오셨던 단골이셨나 봐요."


바텐더의 말에 남자가 그럼, 그럼 답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자주 왔었는지 바텐더에서 설명하는 늙은 남자는 어딘가 유쾌해 보였다.


"나는 이곳에 애도를 하러 오지."


늙은 남자가 잔에 입을 가져가 댄다. 상념에 잠겨 있는 늙은 남자에게 바텐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재즈 음악에 취해 느릿하게 술을 마시던 늙은 남자는 오래전 자신이 죽였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난날의 일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남자는 18년 전 이곳 재즈바에서 연주를 하던 여자를 죽였다.


늙은 남자의 표현에 따르면 여자는 마치 제 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듯했다. 갖은 고생을 겪었는지 초췌함이 있었지만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재즈를 사랑한다고 했던가. 재즈를 위해 모든 걸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몸은 힘들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 역시 그녀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늙은 남자의 귓가에 여자가 흥얼거리던 소리가 들어오는 듯했다.


남자가 두 번째 잔을 주문한다.


"버번. 버번위스키로 하지."


바텐더가 두 종류의 버번을 꺼내 들고 묻는다.


"버번위스키는 현재 트레이스 버팔로와 와일드 터키의 레어브리드가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레어브리드도 켄터키 지방의 위스키 던가?"


"네. 트레이스 버팔로보다 역사가 50년 짧지만 와일드 터키에서도 최상급이라고 알려진 위스키입니다."


"레어브리드로 주게."


바텐더가 잔을 건네자. 남자는 다시금 상념에 잠겼다. 이번엔 자신이 죽인 여자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비가 온 탓이 었던가. 마지막 순간은 바에서 대화하던 순간보다 짧았다. 그게 조금 아쉬웠던 거 같다.


바에서 함께 나와 길을 걷다가 갈림길이 나온 순간 남자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막힌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자의 손에서 우산이 내팽개쳐졌고 여자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 그의 칼이 여자의 손목에 박혀 정맥을 끊어냈다. 여자의 눈이 또 한 번 눈을 깜박이는 사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쏟구치는 핏방울이 뒤섞였다.


그제야 그녀는 너덜거리는 제 손목을 보며 소리를 질렀고 비명은 빗소리에 묻혔다. 남자가 반댓손에 칼을 쥐어주자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칼을 쥔 여자의 손을 붙들고 여자의 복부에 깊숙이 찔러 넣자 움직임이 멈췄다. 끝까지 도움을 청하려 했던 건지 골목 밖을 향한 채 입을 뻐끔거리다가 죽었다. 여자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고 예술이라도 하 듯 여자의 시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양을 잡았다. 그러곤 이내 만족해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날 여자의 소식이 신문에 올라왔었다.


늙은 남자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바텐더에게 그날 신문에 올라왔던 여자의 소식을 말해준다.


"······결론은 유복한 집에서 자란 여자가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났으나, 힘든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지. 때마침 그날이 오늘이기도 하니. 그녀의 애도를 표하고 있는 거라네."


늙은 남자가 빈 잔을 흔든다.


"마지막 잔은 제가 추천드려도 될까요?"


바텐더가 늙은 남자에게 물었다.


"녹색 요정 예술가의 술이라 일컫는 압생트 어떠세요?"

"압생트? 에메랄드 색상의 술을 말하는 건가?"


되묻는 늙은 남자가 바텐더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예술가를 매혹시킨 악마의 술이라 불리기도 해요. '고흐가 귀를 자르게 만든 술' 이라고도 유명하죠."

"조금 전 얘기한 그 안타까운 여인의 눈 색상도 자네와 같은 녹색이었지. 좋네. 그녀를 애도하기에도 알맞군."


말을 하고 난 늙은 남자가 미간을 찡그린다. 그 시절 신문과 뉴스는 흑백이었다. 눈동자 색상을 알리 없지 않은가. 겨우 두 잔에 취했을 리가 없는데. 늙은 남자가 의뭉스럽게 바텐터를 바라보았지만. 바텐더는 표정 변화 없이 꺼내 온 잔에 얼음을 담고 술을 따른다.


"도수가 높으니 유의해주세요."


얹은 말에 늙은 남자의 눈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무언가를 눈치채고 저리 말하는 건가 싶었으나 이내 무심히 건네지는 잔에 괜한 잡념을 지웠다. 잔을 든 손목을 기울여 사각 얼음 위로 물결치는 에메랄드 액체를 내려다보는데 바텐더가 물었다.


"그녀는 정말 자살이었을까요?"


남자가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곧 자정이었다. 마지막 잔을 톡톡 두드리던 남자가 피식 웃고는 되물었다.


"바텐더 생각은 어떤가?"

"글쎄요."


바텐더가 답했다.


"자살이었을까요?"


다시금 같은 물을 되묻는다. 남자가 답했다.


"아니. 그녀는 살해당했지."


달그락, 잔에 들어있는 얼음이 움직이고 남자는 마지막 잔을 단숨에 넘겼다. 독하다는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는지 목이 바짝 태우며 넘어간다. 식도를 따라 흐르는 독주를 느끼며 그는 말하려 했다.


'나에게.'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입모양을 읽은 바텐더가 빙그레 웃으며 대신 말해줬다.


"그래요. 당신에게."


타들어가는 듯한 목줄기에 남자가 컥컥 거리며 제 목을 틀어 쥐었다. 바텐더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릿한 손짓으로 얼음만 덩그러니 남은 남자의 술잔 옆에 약통을 내려놓았다. 끝을 향해 달려가던 노래가 끝났다. 남자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싸늘하게 식어간다. 바텐더가 남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 옛날 남자가 여자의 눈을 감겨주었듯이. 바텐더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그러니 쉿, 우리 아가, 울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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