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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Oct 10. 2022

반백의 나이에 한국어 걸음마를 시작한 미국의 한국인

미국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국인들의 조금 늦은 한국어 배움의 길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중년의 학생은 '가갸거겨'를 배우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고 있다



 

작년 여름 만난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많은 마리 씨는 온라인 교실에 올려진 숙제를 한 번도 빼먹지 않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선생님, 질문 있어요”로 시작하는 긴 메시지를 보내는 극성스러운 학생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돋보기를 쓴 눈에 힘을 주고 수업 내내 컴퓨터 화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마리 씨는 한국의 거리에서 언제라도 만날 법한 평범한 한국 중년 여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막 더듬더듬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마리 씨는 한국인 유학생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집에서도 영어를 썼던 탓에 한국어를 배울 기회나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엄마가 아주 가끔 해준 불고기가 마리 씨가 자라면서 맛본 유일한 한국 음식이었다. 반백의 나이에 접어들어서 한국 영화와 K-pop을 접하고 자신의 애칭을 아미 맘이라고 칭할 정도로 단숨에 BTS의 팬이 된 마리 씨의 온라인 수업 뒷배경은  방탄 소년단의 사진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한국어 배움의 길에 들어섰지만 한국에 가서 부모의 고향을 찾아보고 BTS 콘서트에도 가보겠다는 소원을 품고 있는 마리 씨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다. 


작년 겨울에 만난 데럴 씨와 앤젤 씨가 할 줄 아는 한국어는  ‘안녕하세요’가 전부였다. 이미 자녀들을 독립시킨 데럴 씨와 떡볶이를 좋아하는 앤젤 씨는 한국의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한국 사람 같지만 우리 세종학당에 와서야 한글을 떼었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미국인처럼 자라면서 늘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는 데럴 씨와 앤젤 씨는 뒤늦게 시작한 한국어 공부로 인해 열심히 살아도 채워지지 않았던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중년의 나이에 처음 말을 배우는 두 살짜리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한국어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라는 믿음으로 수많은 마리 씨 그리고 데럴 씨와 앤젤 씨는 가갸거겨를 배우기 위해 한국어 수업을 찾아온다. 한국인 부모에게 태어났지만 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살면서도 한국도 미국도 아닌 공중에 뜬 제3  국의 정체성을 가진 것 같은 마음을 숨긴 채 살아오면서 참 고단했다는 수많은 마리 씨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몹시 안타깝다. 


자신에게 있는 한국인의 피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 대해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혼란스러웠던 인생의 방황을 일찍 끝냈을 거라는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어 교사로서 나에게 찾아오는 한국인 이민자의 자녀들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보게 만든다. 그들은 조부모나 부모의 나라에 가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물건을 사고 음식을 주문하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섞여보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학생들을 만날 때면 나는 그저 한국어 교사로서  한국어만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 사는 것임을 느낀다. 학생들이 나를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잊고 살았거나 외면했던 부모의 나라, 부모의 부모의 나라를 찾아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는 길로 이끌어 주는 그런 일을 내가 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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