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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Aug 28. 2021

난 내가 준비된 임산부인 줄 알았다

5년 동안 임신을 준비했지만 빠뜨린 것

나는 준비된 임산부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임신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제 슬슬 임신을 준비해봐야지 하면서 먹기 시작한다는 엽산을 나는 5년 동안이나 꾸준히 챙겨 먹었다. 오죽하면 그 와중에도 아기가 계속 생기지 않아서, 엽산을 너무 많이 먹으면 혹시나 내성이 생겨 안 좋은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난임 병원의 담당 교수님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는 표정으로(순전히 내 기분 탓이었겠지만) 엽산은 계속 먹으라고 했고, 게다가 나는 술을 완전히 끊은 지도 3년이 넘었으니 이제 내 몸은 정말 아기만 딱 찾아오면 되는 준비 완료 상태였다.


난임 병원을 다니기 시작할 즈음, 아는 언니 한 명이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에 등록해서 1학기를 다니던 중에 임신을 했다. 배에 아기를 품고 그 아기가 세상에 나와 몸을 뒤집고 두 발로 서는 동안 언니의 휴학은 자연스레 자퇴로 이어졌다. 물론 계획 없이 찾아온 아기였음에도 목숨만큼이나 사랑스러웠지만, 친정 엄마도, 산후 도우미도, 집에 아기 옷을 한 아름 들고 놀러 와 주는 친구도 하나 없이 미국의 시골 동네에서 홀로 아기를 키우며 언니는 한동안 산후 우울증을 앓았다.


그에 비해 나는 5년 동안 아기 똥기저귀를 갈며 잠을 설치는 날만을 간절히 그리며 임신을 준비했다. 친구들이 자연분만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밤샘 육아에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때, 나는 그들을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워했다. 이제 노후를 즐길 테니 아기는 네가 키우라던 친정 엄마는, 내가 3년 동안 시험관 시술에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느덧 말을 바꾸셨다. 아기가 찾아와 주기만 한다면, 친정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주시겠다며, 언제든 아기를 자신에게 맡기고 너는 필라테스도 다니고 피아노 학원도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정말이지, 엄마가 될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착각이었다. 5년이나 준비했기에 오히려 빠뜨린 것이 있을 줄이야!




고대하던 아기가 배아의 형태로 찾아와 내 뱃속에서 작은 아기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치아들이었다. 입덧이 심하지 않아 잘 버티고 있던 임신 초기(6주), 예고 없이 치통이 찾아왔다. 코너에서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좌회전하고 훅 들어와 앞을 확 들이받듯이, 어느 순간 밀려든 치아와 잇몸의 고통은 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무력화시켰다. 여느 때였으면 바로 치과에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했겠지만, 임산부라는 신분을 자각한 나는 시큰시큰한 잇몸을 볼 바깥으로 움켜쥐며 대신 유튜브를 틀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임산부 치통’, ‘임산부 치과’, ‘임신 중 치과’


영상들이 알려주는 이야기는 다 같았다. 산부인과 전문가들은 아주 친절하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임산부도 얼마든지 치과 가도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이 끝나기 직전에 늘 따라오는 반전이 있었으니...

‘단, 최소 임신 16주 이후에^^’



10주를 더 참아야 한다고? 두통 치통 생리통 중에 제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치통이라던데? 처음에는 단순히 잇몸통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이틀 째는 오른쪽 윗니의 어마 무시한 통증으로 변했고, 치아의 신경이 깊숙이 잇몸 속으로 연결되어 까맣게 썩어가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눈앞에 시각화되는 듯했다. 손가락으로 문제의 치아를 살짝 건드려봤다가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시큰해지는 고통에 금세 후회하기도 했다. 최대한 적게 씹을만한 음식으로 천천히 조금씩 먹었고, 굵은소금을 물에 섞어 한 시간에 한 번씩 가글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밤에는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치과에 가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감사하게도 치과 선생님은 마취나 치료 하나 없이 문제의 치아 높이를 살짝 낮추는 것만으로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만나지 않도록 임시 조치해주셨고, 치통은 그 다음날 완전히 나았다! 그러니 아무리 임산부라도, 괜히  조심한다고 네이버 다음 유튜브 검색만 하지 않고 일단 병원에 직접 물어보는 게 최고라는 레슨을 얻었다.


(치통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 한 건 아니었기에, 치과 치료가 가능한 16주가 넘으면 다시 치과를 찾기로 약속했으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5주인데 또 매일 미루고만 있다. 다음 주에는 꼭 가야지...)




문제는, 임신 전에 치과 치료를 미리 다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난임 병원 다니는 기간 중에 몇 번 치과에 방문하기도 했고, 시험관 시술 중간중간에 신경 치료도 받았다. 다만 그 기간이 생각보다 오래되다 보니 치아도 '늘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치아는 작년 초 신경치료를 받았던 치아 바로 옆에 있는 치아였는데, 평상시에는 아무 탈이 없다가 이번에 임신 호르몬이 잇몸을 약하게 만들며 갑자기 충치가 급속도로 진행된 케이스였다.


이 일은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나는 준비된 임산부일까? 오래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왔으니, 남들보다 임신의 과정도 더 편하게 통과하고, 출산도 육아도 더 쉽고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생각지도 못하게 치아가 나를 고통스럽게 배신했듯이, 앞으로 남은 과정에서도 언제 어떤 요소가 나의 착각을 무자비하게 깨버릴지도 모른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임신이라는 몸의 변화 앞에서, 나는 다른 엄마들과 다를 바 하나 없이 무력하며, 그녀들과 똑같이 두렵고, 또 설렌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5년을 간절히 기다려 임신을 했다고 해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계획하자마자 바로 임신을 한 임산부보다 아기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임산부다. 매일매일 배가 불러오고 몸이 불어나는 이 과정이 못내 불편한, 밤에 자다가도 화장실을 가려고 세네 번은 깨며 잠을 설치는, 그 와중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려면 허리가 아파서 한참 동안 몸을 일으켜야 하는, 청바지는 서랍장 깊숙이 보관한 채 임신 이후에 구매한 2만 원대의 펑퍼짐한 원피스 몇 벌만 번갈아 가며 입는 임산부다. 그 와중에 배에서 아기가 인기척이라도 하면, 그 태동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혼자서도 실실 웃게 되는, 다른 임산부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임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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