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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의 Nov 21. 2021

출산 하루 전날, 펑펑 울었다

출산 하루 전, 눈이 시큰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 크리넥스 휴지를 뽑아 크게 킁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만우절에 임신 테스트기 두 줄을 본 이래로, 오늘 아침에 나는 우울의 극치를 찍었다.




일요일인데 남편은 일찍부터 출근했다. 회사가 가장 바쁜 시기인데 다음 주 내내 휴가를 내고 아내의 병간호를 해야 하니, 주말에 최대한 일을 정리해두기 위해서다. 남편이 기상하는 시간 일곱 시 반에 맞춰 나도 눈을 떴고, 남편이 현관문을 나간 후에 혼자 차려먹을 단출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어제까지 냉장고의 신선재료를 모두 비워냈기 때문에, 하나 남은 양파 바게트를 흰 우유도 없이 꺼내어 먹었다. 바게트 크기가 꽤 큰 편이라 절반만 먹으려고 했는데, 유튜브 영상을 켜 두고 먹다 보니 어느덧 흔적도 남지 않아 있었다. 속이 답답한 것 같아 침대에 누웠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 열한 시 반이었다. 수술까지 이제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쫓기는 마음으로 서재에 들어가 김초엽의 신간 소설집을 펼쳤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걸 애써 무시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어제까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권을 다 끝내 놓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조리원에 7권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일요일인 오늘까지 6권을 마무리지어야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제 많은 시간을 들여 책을 미리 완독 했다. 아마 오늘 읽어야 했으면, 이 산만한 정신으로 도저히 프루스트의 문체에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소음의 방 안에 혼자 앉아서 인지적 세계, 감각 체계, 우주, 서로 다른 존재들을 다루는 김초엽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어느덧 몽롱한 꿈의 세계로 진입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틱톡틱톡,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



틱톡틱톡,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가 끝나간다.


우울함의 근원은 두려움에 있었다. 퍽 익숙해져버린 세계가 얼마 남지 않았고 내가 모르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 5년 간의 난임으로 내가 꽤 많이 지쳐있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생활도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울었던 날들도 많지만, 나만 생각하면 되니 자유롭고 몸이 편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밤새 아기를 돌보느라 잠을 설치고 똥기저귀를 갈며 손목을 아파하는 걸 질투하는 동시에 남편과 주말마다 낮잠을 즐기며 몇 시간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미드를 정주행 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일보다 사람이 어려웠는데, 작년 5월 임신을 목적으로 난임 휴직을 낸 후에는 책과 글에 기꺼이 마음을 의지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돈을 벌지 않고 꼭 필요한 만큼은 소비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 날들이 일 년 넘게 이어졌다.


이제 단 한 권의 책을 완독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끌어모아야 할까? 브런치에 글을 한 편 발행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3분과 5분들을 쪼개고 쌓아야 할까? 잠이 올 때 눈을 붙이지 못하고 몸이 찌뿌둥할 때 마음껏 반신욕을 하지 못하는 날들은 앞으로 몇 년동안이나 계속될까?


이제는 20시간도 남지 않은 지금의 자유가 나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평생을 함께 한 애인이 내일 나에게 이별을 고하게 될 것을 미리 예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분 단위로 시간을 의식하며 떨고 있었다.


이런 몽롱한 우울함을 톡 깨어버린 건,
하얀소띠 임산부 오픈채팅방에 올라온 동영상이었다.


지난달 제왕 절개로 출산한 엄마가 공유해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아기의 50초짜리 클로즈업 영상 하나. 옹알이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아기가 두 팔을 기지개 켜듯이 뻗친 채, 천천히 눈을 뜨고 두 볼과 입꼬리, 눈썹과 코 근육 만으로 수십 가지 표정을 보여준다. 너무 이쁘다. 맘카페의 오픈채팅방을 통해 알게 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여자의 아기인데, 이렇게나 이쁘다니.


그제야 나는 문득 고개를 내려, 만삭의 배를 바라보았다. 맞다, 여기에 우리 아기가 있었지. 처음부터 쭉 태동이 작았던 아기라서 실감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올해 누렸던 그 많은 자유 시간에 늘 아기가 함께 있었다. 내 아기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십 개월 동안이나 엄마를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나는 왜 혼자만의 시간이 끝나간다고만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있는 거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아기가 귀엽다며 미소 짓고 있는 걸까.


50초짜리 동영상이 채 끝나지도 않았은데, 미안함이 울컥 밀려들어와 눈물이 났다. 영상 속 아기는 코를 한껏 찡그리며 팔을 휘젓고 있었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러 휴지를 찾았다.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뱃속 아기가 조용히 딸꾹질을 시작한다. 딸꾹질은 세상에 나올 순간을 대비해서 아기가 호흡 연습을 하는 거라고 의사가 알려주었다. 그동안 아기가 힘찬 발차기 태동 대신에 작은 딸꾹질로 존재를 알릴 때마다, 나는 배꼽 근처에서 맥박이 크게 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일, 드디어 너를 만나러 간다. 오래 동안 간절히 바랐던 세계가 시작된다.


딸꾹딸꾹.

콩닥콩닥.

틱톡틱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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