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 올해도 장맛비가 제대로 기세를 부릴 모양이다. 하지만 빗줄기가 작정한 내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서울 나들이 때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그 곳!
구름이 더께 쌓인 하늘 아래로 희끔희끔 감추듯 내민 안산 자락이 전설처럼 신비롭다. 비탈진 풀숲 길을 조심스레 올라섰다. 푸성귀에 쏟아지는 흰 빗줄기 사이로 적 벽돌의 육중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다. 이 역사적 현장에 발을 내딛게 되다니! 버거운 감격과 함께 너무 늦게 찾은 것만 같은 한 조각 양심이 저 혼자 불편한 소리를 꺽꺽 냈다.
중앙사에는 형무소에서 사용된 기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발목체코, 수갑, 물고문방, 형틀, 손톱 밑을 찌르는 긴 목재바늘, 일본순사들이 사용한 단검과 장검들, 고문인두, 손톱 뽑는 기구, 교수대... 기물마다 그 앞에 서면 공포로 다가왔을 고문의 현장이 연상되어 섬뜩했다. 차마 조국을 배신하지 못하고 죽기를 각오한 채 견디었을 그날의 독립투사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우리는 잊으면 안 되는 역사 앞에서 너무 안이하고 편하게 사는 건 아닌지 부끄러움마저 인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늘상자와 벽관이다. 바늘상자는 바닥을 제외한 다섯 면에 가시처럼 뾰족하고 긴 바늘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맞지 않는 신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듯 그 속에 사람을 넣고 마구 굴리며 흔들어 댔다니 온몸이 피범벅이 된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벽관은 말 그대로 벽 속에 관을 세워둔 모양의 감방이다. 관보다 더 협소해서 배를 힘껏 눌러야 만이 겨우 문이 닫힐 정도인데 수감자를 차려 자세로 세워놓고 자물쇠로 문을 채우는 1인 고문형 감방이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끝나지 않는 고문이 주는 고통을, 그 공포를, 어찌 다 참아냈을까.
동선을 따라 옮기는데 독립투사들이 갇혀 있던 옥사가 어두운 민낯을 드러낸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곳은 11, 12, 10, 9번의 네 개 동과 여성들을 수감한 옥사 한 동이었다.
감방의 인방마다에는 수용인수와 출정한 인수가 집계된 명패가 붙어 있었다. 독방을 제외하면 13제곱미터. 네 평이 채 못 되는 쪽방에 3,40명씩 수감이라니...시큼시큼 찌든 땀 냄새가 진동했을 옥사 안을 떠올리는 순간, 하마터면 욕지기가 날 뻔했다. 민주투사 고 신영복 선생은 이곳을 회상하여 말하기를, 켜켜이 모로 누워 앞뒤로 맞댄 살과 살이 짓이겨지면 피차에 열덩어리처럼 느껴져 같은 편끼리 증오했던 일이 노역과 고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그 고충 또한 어떠했으랴.
어둡고 침울한 옥사를 두시간 남짓 탐방하고 나오니 비가 멈춘 바깥은 환하고 허허롭고 따뜻했다. 참으로 교육은 종이 위에 새겨진 죽은 문자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되어질 때 비로소 산 교훈이 되나 보다. 애국에 청춘을 팔아 감방에서 스러져간 독립투사들...
그 상처 위에 피어난 꽃이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작금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 영광이 마냥 달달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