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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유목민 Jul 02. 2024

그때는 그걸 왜 몰랐을까

엄마라는 땅

 나이 들어가면서 어릴 적 먹고 자랐던 토속음식들이 좋아진다. 헛간에 매달아 말려둔 시래기를 푹 삶아 된장 넣고 참기름에 볶아 먹던 시래기나물, 신김치와 두부를 썰어 넣고 끓인 청국장, 고추장이나 된장에 박아둔 장아찌, 밥 위에 살짝 쪄서 내놓은 호박잎쌈, 텃밭에서 방금 따온 고추를 노랗게 곰삭은 된장에 찍어 먹던 보리밥. 화려하고 간편한 밀키트가 일상화된 지금 어찌 보면 촌스러운 그 음식들이 너무도 그리워진다.

 때로는 나름대로 장아찌를 담그고, 베란다에 나물들을 말려 음식을 해볼 때도 있지만 엄마의 손맛을 영 살릴 수가 없다.

 엄마는 유난히 장독대에 정성을 들이셨다. 고추장이나 된장 항아리에 박아 놓은 무나 오이를 꺼내 참기름과 깨소금 넣고 무친 장아찌를 찬물에 만 밥과 함께 먹으면 매콤 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항아리 속에 때로는 깻잎이나 콩잎, 참외나 떫은 감도 들어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떫은 감도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쫄깃하면서도 아삭한 맛으로 변해 미각을 돋워주곤 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날이면 항상 생각나는 맛이 있다.

 그날은 고등학교 수업료를 내야 하는 마감 날이었다. 그 당시에는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육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은 복도에서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한참 감수성 풍부하고 민감하던 여고 시절,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동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곤 했던 때였다.

 그날도 우리 반 담임은 납부금을 내지 못한 아이들을 차례로 불러 세우기 시작했다. 나도 앞으로 불려 나갔다. 앞으로 불려 나간 아이들은 언제까지 납부금을 내겠다고 선생님과 약속하고 나서야 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앞으로 불려 나간 나는 엄마가 오늘까지 납부금을 가져올 거라고 담임에게 말했다. 오늘 학교 문 닫기 전까지 꼭 약속을 지키라고 담임은 못을 박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고 자리로 들어와 앉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만약 가져오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학생이 되는 것이고, 내일 아이들 앞에서 손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 당시엔 아버지 가구점 사업이 퇴로를 걷고 있어서 엄마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있던 때였다.


 그날 아침에 등교하기 전, 나는 엄마에게 오늘까지 육성회비를 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울먹였다. 정말이지 돈을 내지 못해 반 아이들 앞에서 당하는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은 죽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웠다.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학교에 다니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엄마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아가, 오늘까지는 어치케든 납부금을 갖다줄랑께 울지 말고 얼렁 학교에 가그라. 약속 꼭 지킬 텡깨 엄마를 믿어야. 알것제?”

 나는 ‘엄마를 믿으라.’는 말에 확신이 생겨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수업 시간에도 공부가 되지 않았다. 연신 창밖만 내다보며 엄마가 언제 오나,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나는 너희들이 납부금을 안 냈다고 해서 불러낸 건 절대 아니다. 너희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은 중요하다. 너희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로 벌을 받는 것이다. 손들어!”

 앞으로 불려 나간 아이 중 약속 날짜를 지키지 못한 아이들은 교단 앞에서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 행정실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순간순간 일 초일 분이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행정실 앞 복도를 서성이며 엄마를 기다렸다. 학생들이 학교를 다 빠져나가고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거의 퇴근하고 없었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도저히 더는 행정실 앞에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운동장을 지나 교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교문이 닫힐 즈음, 멀리서 엄마가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머리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추운 날 장터에서 찬바람 맞은 엄마의 얼굴은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행정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은 차가웠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날 약속한 대로 엄마와 함께 행정실에 가서 육성회비를 낼 수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엌 부뚜막 앞에 앉아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후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맸다.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부엌 안을 오가며 저녁거리를 만드는 엄마의 눈빛은 진지했고 분주했다. 종일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와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엄마의 빠르고 경쾌했다. 파를 썰고 마늘을 다지는 엄마의 손놀림은 장인의 손끝처럼 노련했다. 가마솥에서 김이 올라오며 밥이 끓자 엄마는 달걀 다섯 알을 깨서 새우젓 넣고 밥 위에 쪄냈다. 엄마는 끓고 있는 시래깃국을 한 수저 떠서 내 입에 불어넣으며 맛이 어때?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할 만큼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는 시래깃국이었다. 엄마는 장독에서 꺼낸 오이장아찌를 물에 담가 짠물을 뺀 다음 잘게 썰어 참기름에 무쳤다. 그날 저녁 반찬은 김치와 오이장아찌, 새우젓을 넣고 찐 계란찜이 전부였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저녁밥이 맛있었는지. 그날 학교에서 엄마를 기다릴 때 온몸으로 조여오던 불안함. 일분일초를 다투던 간절한 기다림 끝에 엄마를 봤을 때의 울컥한 마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평화로운 저녁상. 가족들이 둘러앉아 그 음식을 먹으며 전해지던 충만함과 안온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의 손맛이 잊히지 않는 건 엄마의 사랑이 내 몸속 세포 구석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뿌듯한 엄마의 사랑을 들이마시듯 그렇게 시래깃국을 들이마셨고, 오독오독하게 씹히던 오이장아찌의 식감을 오래 음미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렇게 엄마의 음식을 먹으며 키가 컸고, 장기들이 자라났다.

 그때는 그걸 왜 몰랐을까.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우리는 엄마라는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쭉쭉 빨아들였던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엄마처럼 그렇게 자식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 나 같으면 피곤하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며 자식들 목을 조였을 텐데.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손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언저리는 언뜻언뜻 먼 하늘가에 머물곤 한다. 주방 창밖으로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새는 곧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네 인생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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